1997년 12월30일 서울구치소에서 처형된 사형수의 관을 붙들고 오열하는 유족. 이날 이후 한국에서 사형 집행은 없었다.

나는 1985년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으로 체포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다. 미국에서 정치학 석사과정을 밟다가 재미동포의 소개로 유럽의 북한 대사관을 방문해 그들과 민족 문제를 놓고 이런저런 토론을 한 것이 전두환 정권에 포착되어 간첩죄로 기소되었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아무런 간첩 행위도 하지 않았는데 사형선고를 받은 사실은 외국과 인권운동가 사이에서 대단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미국 국무성·국제사면위원회 등이 긴급히 사형 집행을 보류할 것과 사건 재조사를 요청했지만, 철옹성 같은 독재 정치를 펼치는 전두환 정권은 주권에 대한 부당한 간섭으로만 여기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 아래서 정치범에 대한 사형선고는 그저 한번 해보는 협박이 아니었다. 1986년 5월 서울구치소 강당에서 재소자와 함께 예배를 보면서 다른 정치범 사형수 사이에 앉게 되었다. 나이가 젊은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시던 그분들의 눈빛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예배를 보았는데 그로부터 사흘 후 사형집행이 있었고, 내 양옆의 사형수는 그날 이슬처럼 사라졌다. 내가 서울구치소에 입소하고 나서 1년 사이 사형 집행이 두 번 있었는데 정치범 7명을 포함해 20여 명이 사형집행을 당했다. 사형을 선고받은 순서로 보아 두세 번째 대기 순서로 사형 집행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인 1987년 6월 민주화의 함성이 온 거리를 뒤덮으면서 정치범에 대한 사형 집행이 중단되었고, 이듬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다.

사형수의 삶은 우선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할 수 있다. 온갖 눈에 보이는 현상과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은 다 슬픔을 자아낸다. 가족이 면회를 와서 우는 모습을 보는 일, 같은 죄수이지만 단기형을 받고 이감하면서 희망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을 보는 일, 감방 안에 갇혀 있다가 짧은 운동 시간에 푸르고 싱그러운 하늘을 보는 일, 이 모든 일은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에게 슬픔을 자아낸다. 눈에 보이는 모습만 슬픔을 자아내는 것이 아니다. 머릿속에서 추억의 사람, 추억의 장소가 생각나면 그 사람을 만나보고 싶고, 그 장소로 달려가고 싶어 몸살이 난다. 그러나 그 마음을 접고 그 감정을 누르면서 교수형을 기다려야 하는 사형수에게는 머릿속의 추억이 모두 슬픔일 뿐이다.

사형수는 회개하지 않는 악인인가

사형수의 삶의 또 하나 특징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오는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의 세계, 그 미지의 세계가 무서운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사형수도 없지는 않겠지만, 사형수에게는 죽음의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 무섭다. 마음을 놓고 있다가 돌연 ‘죽음의 순간이구나!’ 하고 느꼈을 때 귓전을 때리는 그 심장의 고동소리와 생각이 정지하는 순간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사형수는 교수형 집행당할 때에만 죽는 것이 아니다. 집행 날짜는 예고가 없다. 아침에 운동 시간이 지났는데 소내에서 운동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든가, 이유 없이 각 사동의 소지(청소 출역수)들이 모두 호출되어 사라진다든가, 평소와 달리 소내가 너무도 조용해 정적이 감돈다든가 하면 오늘이 그날인가 하고 불안해한다. 그래서 ‘사형수는 하루에도 여러 번 죽는다’는 말이 교도소에서 회자된다.

사형 집행일이 되어도 집행 대상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날은 그야말로 쥐 죽은 듯 조용한데 한쪽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으므로 숨소리 외에는 들리는 것이 없을 정도다. 그렇지만 단 한 가지 크게 울리는 소리가 있다. 교도관이 사형수를 끌어내기 위해 몰려다니는 발자국 소리다. 그 발자국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다가 방 앞에서 멈추면 죽음이요, 지나쳐 가면 삶인데, 한번 지나간 발자국 소리는 20분쯤 후 다시 시작된다. 한번은 집행장으로 끌려가던 사형수가 교도관들에게 소원을 이야기하기를, 절친했던 동료 사형수의 얼굴을 한 번만 보고 작별인사를 하게 해달라고 해 그 사형수를 잠시 끌어내었으니 그 동료 사형수에게는 얼마나 잔인한 순간이었을까.
 

13년 2개월간 사형수로 살다 나온 김성만씨.

사형수의 고통은 정신적 고통에 그치지 않는다. 사형선고를 받으면 24시간 수갑을 차야 한다. 낮에는 앉아 있으므로 수갑이 덜 고통스럽지만, 밤에 누워 있을 때에는 팔목과 어깨가 보통 아픈 것이 아니다. 반듯이 누우면 팔에 무게가 실리므로 저절로 팔이 내려가는데, 그러면 수갑의 날카로운 금속이 팔목을 파고든다. 팔목이 아파서 모로 누우면 누운 쪽 어깨가 잠시 후 저려오고 수갑에 매인 다른 쪽 팔도 아파온다. 결국 밤새도록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밤을 보내야 한다. 사형수 때 나는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사람 중에서는 가장 불쌍한 존재이고, 나보다 더 불쌍한 존재는 짐승 가운데서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슬픔과 고통, 죽음의 공포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형수는 누구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왜 나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일까? 왜 나는 이러한 고통을 겪는 것일까?’ 정치범의 경우는 확신범으로서 다를 수 있겠지만 일반 사형수는 교육 수준, 지능, 인성에 관계없이 극심한 고통 속에서 그 누구라도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고, 자기가 사회적으로 어떠한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스스로 자신의 문답 속에서 절절히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과 회한은 교수형 집행의 순간까지 날이 갈수록 깊어진다.

사형수는 특별한 존재일까? 일반 사람처럼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일까? 정신적·병적인 결함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결코 그렇지 않다. 사형수 수십 명과 호형호제하며 지냈고 그들의 죽음을 겪어본 사람으로서 내가 얻은 결론은, 사형수는 사형선고 이전까지는 자기 인생을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존재다. 그러다 사형선고를 받고 절절한 고통 속에 들어서고 나서야 자기의 인생을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 법을 어기지 않음으로써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은 간곡한 마음이 생기지만 이미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교수형뿐이다. 그들이 집행장에서 남긴 절절한 유언은 이러한 회한을 토로하고 있다.

사회에서 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반 사람은 어떠한 생각 속에서 법을 지킬까? 무엇보다도 자신과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형수들이라고 유독 별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그리고 어떤 이들에게는 자기의 인생과 가족을) 사랑하는 방법을 깨닫지 못했던 사람들인 것이다. 사형선고가 아니었다면 그들의 철저한 반성이 불가능했을 것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완화된 고통 속에서 한동안 자신의 미련함을 많든 적든 고집스럽게 붙잡고서 떨쳐내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사형선고가 아니더라도 반성의 깊이와 속도가 결국 세월의 무게를 이겨낼 수는 없다. 현재 무기수가 사실상 15~20년 복역 후 석방되고 있으므로 사형 대신 종신형이 주어진다면 아마도 20~30년의 복역 기간이 지나야 석방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세월의 무게라면 개심(改心)하기에 충분한 기간이다.

기자명 김성만 (연세대 박사과정)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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