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에서 모인 브뤼셀 유럽연합(EU) 본부 출입기자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기회는 흔치 않다. 거의 유일한 기자단 행사로는 해마다 이맘때쯤 열리는 연극 축제를 꼽을 수 있다. 올해는 이 연극이 밸런타인데이인 지난 2월14일 알버트 홀에서 열렸다.

EU 출입기자들이 직접 극본을 쓰고 연출하고 배우로 활약한 이 쇼는 유럽 주요 정치인과 EU 간부를 패러디하고 조롱하는 정치 풍자 코미디 다. 비유하면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모여 이명박 대통령, 이동관 대변인 등을 풍자하는 ‘개그 콘서트’를 꾸민 셈이다.

지난해 연극에서 주로 놀림거리가 된 사람은 EU 이사회 의장이던 ‘유럽의 조지 부시’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었다. 불행히도 올해 EU 이사회 의장은 재미없고 따분한 체코 총리인지라, 연극 주제는 유럽을 강타한 금융 위기와 최근 발생한 스파이 소동으로 옮아갔다. 연극 제목은 버락 오바마의 슬로건 ‘예스 위 캔’을 빗댄 ‘노, 위 캔트(No, we can’t)’였다.

유머를 이해하려면 EU 안팎에서 벌어지는 현안과 배경 지식을 알 필요가 있다. 한 장면을 소개하자. 〈갓 파더〉의 주제곡이 흐르면서 마피아가 모여 회의를 한다. 행동대장이 말한다. “보스, 이제 은행을 털기는 어렵겠어요.” “아니, 왜?” “은행에 돈이 없거든요.”(배경 지식: 최근 금융 위기로 파산하는 유럽 은행이 속출하고 있다.) “그럼 다른 신규 사업을 생각해보자고. 뭐가 좋을까?” “EU 의회 은행을 습격하는 게 어떨까요?”(배경 지식: 지난 2월12일 EU 의회 빌딩 내 ING 은행 지점이 강도를 맞았다.) “아냐, EU 본부에 잠입해 비밀 문서를 훔쳐 파는 거야.”(배경 지식: EU 보안 간부가 EU 본부 내에 스파이가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EU 출입기자들을 잠재적 스파이로 간주한 발언이 문제가 돼 출입기자단(API)이 항의하는 소동이 있었다.) “거 좋은 생각이군. 이제 워싱턴에서 월급을 받으며 살 수 있겠어.”(배경 지식: 미국 정보 기관이 브뤼셀에서 암약하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며, 어떤 단체는 CIA의 후원을 받는다고 알려져 있다.)

연극을 보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풍자당하는 쪽에서 흔쾌히 유머를 수용하는 모습이었다. 한 기자 배우가 EU 집행위 간부로 분장해 억양을 흉내내며 놀리고 있는데, 필자 옆의 옆 자리에 그 간부가 앉아 있었다. 그는 키득키득 웃으며 박수를 쳤다.
 

ⓒ시사IN 신호철유럽연합 본부 출입기자들이 해마다 여는 기자 연극제(위)의 인기가 높다.


EU 관계자도 무대에 올라 현실 풍자

아예 직접 무대로 올라간 EU 관계자도 있었다. 연극 한 꼭지를 EU 대변인 4명이 통째로 맡아 출연한 것이다. 그들이 연기한 내용은 이렇다. 브리핑을 20분 앞두고 ‘에너지 액션 플랜’ 문건을 급히 작성하던 중 갑자기 정전이 돼 사무실 불이 꺼진다(배경 지식: 러시아·우크라이나 간 가스 분쟁으로 동유럽 정전 사태가 빚어져 EU가 곤욕을 치름). 이에 대변인들은 사이클 선수복으로 갈아입고 실내 자전거 발전기를 돌리며 불을 켜는 데 성공한다.(배경 지식: EU는 가스 분쟁 사태의 대안으로 친환경에너지 보급을 내세움.)

이 연극을 주최한 영국 출신 기자 제프 미드 에게 대변인이 참여한 배경을 물었다. 그는 “애초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으나, 우리 연극이 EU집행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관객도 기자보다 집행위 관계자, 정치인, 로비스트 등이 더 많다. 하지만 제아무리 높은 사람이 참석하거나 출연을 요청한다 하더라도 대본을 바꿀 생각은 조금도 없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대사 중에는 뼈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EU 본부에 잠입하는 데 성공한 부하에게 보스가 묻는다. “그래,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던가?” “아무것도 없던 걸요. 그냥 위원회 회의, 그룹 회의… 그리고 칵테일 파티.” 보스가 말한다. “그래. 매일 낮 12시에 교회 예배 같은 게 열리지. 얼간이 같은 사람이 연단에 올라서 헛소리를 해대지.” 낮 12시는 대변인이 정례 브리핑을 하는 시간이다.

기자명 브뤼셀·신호철 기자 다른기사 보기 shi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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