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안희태국내 대표적인 마르크스경제학자인 김수행 교수(위)는, 지금은 경제 위기를 지나 공황 단계에 와 있다며 근본적 대책을 촉구했다.
여섯 차례에 걸친 〈시사IN〉 신년 강좌가 모두 마무리됐다. 마지막 강연은 2월16일 ‘김수행에게 정태인이 자본의 미래를 묻다-세계 공황의 위기 속에서 한국경제의 갈 길은 어디인가’라는 주제로 열렸다. 지난해 2월 서울대를 정년퇴임하고 지금은 성공회대 석좌교수로 재직 중인 김수행 교수는 국내 대표적인 마르크스경제학자이자 그 교과서인 〈자본론〉 번역자다. 마르크스경제학의 핵심인 ‘공황이론’은 김 교수의 박사논문 주제. 최근 정치경제학에 대한 대중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김 교수도 바빠졌다. 그의 오랜 식견을 빌리려는 사람들의 강의 요청이 쇄도하기 때문이다. 정태인 교수(성공회대 겸임교수·진보신당 인터넷방송 칼라TV 대표) 역시 예약이 밀려 있는 인기 강사지만 이날은 진행자로 참석했다. 

본 강연에 앞서 정 교수는 평범한 은행원이던 김 교수가 뒤늦게 마르크스를 공부하게 된 연원을 들추었다. 박정희 정권 말기, 전두환 정권 초기였던 시절 마르크스를 공부하겠다는 결심은 한국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마음먹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질문에 김 교수는 “통이 큰 집사람 덕분이었다(웃음)”라고 회고했다. 대학 2년 선배인 신영복 선생이 무기징역형을 받은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기소유예로 풀려나긴 했지만 앞길이 막막하던 차, 한국외환은행 조사부에 특채로 채용돼 영국 런던 지사에서 근무하게 되었던 게 마르크스와 김수행이 만난 최초의 인연이었다. 때는 1972년 2월. “서점에 가니까 자본론이 얼마나 많던지 깜짝 놀랐다.” 문화적 충격도 느꼈지만, 1974∼1975년 오일쇼크와 함께 찾아온 세계 공황이 그를 자극했다. 공황이론은 마르크스경제학밖에 없었다. “생계 문제가 가장 컸다.

아이들까지 모두 다섯 식구였는데 당연히 집사람과 상의해야 했다. ‘내가 이거 하면 한국에도 못 돌아가고 밥도 못 벌어먹을지 모른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좋아하는 걸 하라’고 말해줘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당시 나이 만 33세. 젊은 학생들과 경쟁하는 데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나이 들어 약해지는 기억력. ‘늦깎이 김수행’은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기억력을 이해력으로 커버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런 이후 앉았다 하면 12시간씩 일하는 버릇이 굳어졌고, 이 버릇은 〈자본론〉을 번역할 때도 큰 도움이 되었다.

오바마, 전쟁으로 공황 탈출?

마흔일곱 살의 그가 또 뒤늦게 서울대에 임용될 수 있었던 건 ‘87년 항쟁’의 산물이었다. 마르크스경제학 수업을 받고 싶다는 학생들의 시위가 거셌고, 그 덕분에 미국·주류경제학에 둘러싸인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유일한 비주류로나마 존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정년퇴임한 이후, 그것마저 사라졌다.

“우선 교수 투표로 임용을 결정하는 절차에 문제가 있어요. 경제학과 교수 32명이 모두 주류경제학적 연구 방법을 쓰는 사람이고 그중 30명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자기들과 맞지 않는 사람을 뽑겠어요? 그보다 저는 학생들의 문제가 크다고 봐요. 자기들이 공부를 폭넓게 하고 싶다면 자꾸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데 그걸 하지 않고 있는 거잖아요.”

2시간 넘게 이어진 김수행 교수의 강연은 200년 자본주의 역사의 축약본이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공황은 왜 발생하며, 그 사례로 1974~1975년 경기 침체와 1997년 한국의 외환 위기, 그리고 미국발 서브프라임 사태로 촉발된 지금의 세계 경제 위기를 마르크스의 공황이론으로 설명했다. 그의 육성을 요약해 옮긴다.

ⓒ시사IN 안희태이날 강좌의 진행을 맡은 정태인 교수.
‘위기’와 ‘공황’을 구별해서 보자. 자본주의 경제에서 경기 침체(recession)는 한마디로 물건이 팔리지 않는 거다. 그럼 기업이 도산하고 은행도 망한다. 이렇게 줄도산이 시작되면서 경기가 확 꺾이면 공황이다. 마르크스가 살았던 19세기에는 중앙은행이 금을 보유한 만큼 화폐를 찍어내는 금본위제였기 때문에 위기와 공황이 한꺼번에 닥쳤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정부가 화폐를 무한정 찍어낼 수 있게 되면서 기업이 망할 지경이 되면 정부가 돈을 풀어 어느 정도 선에서 경기 회복이 가능해졌다. 회복과 공황, 그 기로에 있는 상태가 위기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을 보자. 미국 경제는 2007년 9월 위기가 왔다. 하지만 정부가 은행에 돈을 쏟아부었는데도 회복되지 않고 파산이 속출했다. 2008년 3월부터는 공황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경제에서 공황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자본가들은 이윤을 높이기 위해 기술을 도입해 생산량을 늘리거나 또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고 비정규직을 늘리는 방식을 취한다. 그러면 생산은 늘지만 정작 물건 살 사람이 없어서 수요는 줄어들고 이는 다시 기업과 은행의 도산으로 이어지는 모순이 발생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과잉생산, 과잉 축적으로 발생하는 공황은 필연이다.

19세기에는 10년마다 공황이 발생했지만 20세기 들어 정부가 금융·재정 정책을 취하면서 공황은 드물게 나타났다. 1950~1960년대 대호황을 거친 뒤 발생한 1974~1975년 공황을 보자. 주류경제학에서는 이슬람권의 석유수출기구(OPEC)가 탐욕스럽게 석유 가격을 올려 공황이 왔다고 말하지만 이는 방아쇠를 당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 경제는 이미 1970 ~1971년 경기 후퇴 국면에 들어가 있었다. 정부는 돈을 풀었지만 생산 부문에 투자되지 않고 원자재·곡물 투기에 쓰였다. OPEC이 석유 가격을 4배로 올린 것도 그런 경향에 편승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물가상승이 심해지고 정부는 다시 긴축정책을 펴야 했다. 시중에 돈이 말라버리니 상품이 팔리지 않고 이는 기업과 은행들에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1997년 외환 위기 사태도 마찬가지다. 주류경제학에서는 연고자본주의나 도덕적 해이가 원인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자본주의 경제에 내재하는 정상적인 공황으로 본다. 1990년대 중반 한국의 대기업은 후진국형 노동집약 산업과 선진국형 기술집약 산업 사이에서 투자의 진로를 어디로 잡을지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돌파구를 전자·석유·조선·자동차에서 찾고 외자를 차입해 엄청나게 투자했다. 1996년쯤 되어 수출을 시작하려 하니까 세계 시장은 이미 위축됐고, 생산은 과잉이었다. 그래서 1997년 1월 한보철강이 망했고, 6월에 기아자동차가 망했다. 기업에 대출해준 은행도 망했다. IMF가 한국에 570억 달러를 꿔줬는데 당시 우리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타이완·홍콩·중국에도 미국 자본이 많이 들어갔다. 그 돈이 IT산업에 집중 투자됐고 다시 과잉생산이 되어 위기가 찾아온다. 그게 1999∼2000년의 IT 버블이다. 다시 미국은 기업과 은행을 살린다고 돈을 쏟아부었는데 이번에는 그 돈이 주택 부문으로 갔다. 주택을 사고파는 사람에게 돈을 많이 꿔주니까 주택 가격은 치솟았고, 비우량 차입자에게도 마구 대출되었다. 설사 대출금을 갚지 못한다 하더라도 담보로 맡겨진 주택을 팔면 원금 회수가 가능하다고 금융기관은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상누각이었다. 주택 가격이 떨어지자 주택을 담보로 한 채권도 휴지가 되었다.

지난해 가을 미국 정부가 금융권에 구제금융 7000억 달러를 쏟아부었지만 돈이 돌지 않았다. 은행 자체의 빚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 금융기관들은 다음 조처를 기대한다. 자신들의 부실 채권을 정부가 사주길 바라는 것이다. 정말 나쁜 사람들 아닌가. 잘나갈 때는 자기들이 이익을 다 챙기고 손해가 나니까 국민들 혈세를 내놔라 하는 식이다. 이런 은행들을 왜 국민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나. 한번 얘기 좀 해봐라(청중 박수). 정부가 이런 식으로 돕는다고 경제가 살지 않는다. 미국은 무역수지가 늘 적자다. 자본은 투기에 쓰이고 물건은 수입해 쓴다. 또 항상 전쟁을 하니 재정 적자가 말이 아니다. 중소기업, 자영업자 등 내수 시장을 살려야 한다. 사회보장제도를 확대하면 된다. 교육·의료 부문에 투자하는 돈은 결국 내수 시장을 활성화하는 데 쓰인다. 사실 나는 오바마 정부가 사회보장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은 기득권 세력이 굉장히 강력한 사회다. 오바마 대통령 자신은 평화경제와 내수 시장 확대를 원하겠지만 사회보장제도를 확대하려면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크기 때문에 전쟁이라는 탈출구를 선택할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신년강좌 ‘위기에서 길을 묻다’는 이번호로 연재를 마칩니다.

기자명 정리·박형숙 기자 다른기사 보기 phs@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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