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왼쪽)와 심환지(오른쪽)
도목정사(조선시대 문무반 인사)가 잘되었다고 하니 매우 다행이다… 남인들은 초사(初仕:첫 벼슬)를 얻지 못한 것을 자못 불만스러워한다는데 차후에 김성일의 자손을 거두어 써서 크나큰 비난을 막는 것이 어떠한가. 감역(監役)을 소론에게 돌리지 않는다면 또 무슨 욕을 먹겠는가. 껄껄(呵呵). 이만 줄인다.
(1797년 12월21일, 심환지가 주도한 조정 인사에 만족하며 보낸 편지)
요사이 각 도에서 정리곡(整理穀)이라고 하면서 2~3전씩 돈을 주고는 일곱 말의 쌀을 거두거나, 몇 전의 돈을 주면서 가을에 2~3냥의 돈을 받는다고 한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욱 심하여 지금 민간에서 떠들썩하게 모두들, ‘조정의 사재(私財)’라고 한다. 봄에 한 알 흩어주어 가을에 만 알이 익도록 하겠다는 지극하고 성대한 뜻은 미천한 사물도 감동시킬 만하다. 그런데 어떤 관리가 이처럼 공적인 일을 빙자해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는가…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 어찌 심히 분통스럽지 않겠는가.
(1797년 10월6일, 정리곡의 폐단에 대해 분통함을 나타낸 편지)

남의 옳지 않은 점을 보면 힘껏 말하고 통렬히 배척하는 것이 벽파의 장점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후로는 옳지 않은 일에 대해 의논하기를 기다리지 말고 그때마다 곧장 말하도록 어용겸과 상의하여 하나의 규범으로 삼는 게 어떤가. 이 편지는 즉시 태워버리도록 하라.

(1798년 6월20일, 벽파의 장점을 두둔하며 회유하는 편지)

지금 소위 벽파라는 자들은 모두 아침에 동쪽으로 갔다가 저녁에는 서쪽으로 가고, 냄새를 쫓아다니며 모였다가 흩어지는 무리이니, 오는 사람을 굳이 막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른바 누구누구 이하는 모두 우습다… 하물며 경은 한 사람뿐인 데다 늙었다.

(1800년 4월23일, 벽파가 국왕이 천명하는 의리를 따라야 한다며 다그치는  편지)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는 듯하다’라는 말이 나온 것은 경이 낯빛을 조심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알아냈기 때문이다. 요사이 얻어들은 이야기가 많으니 경과 절친하다는 자가 또다시 경과 절친한 사람에게 말을 전하는 일이 없겠는가? 이러한 사리와 분수를 어찌 간파하지 못하는가.

(1799년 4월10일, 심환지에게 입단속을 요구하는 편지)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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