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한향란노진아씨의 작품 ‘미생물’은 먼지 세포를 확대했을 때 나타날지 모르는 생물을 형상화했다.
요즘 서울 사비나미술관에 들어서면 ‘섬뜩한 광경’에 쭈뼛 놀라고 만다. 1층 중앙에 자리 잡은 설치 작품 ‘미생물’(노진아 작) 때문이다. 멀리서 보면 살색 미생물은 대궁이 긴 버섯 혹은 남성의 성기를 모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가까이 다가서면 더 기이하다. 맨머리의 사람 얼굴이 꼭대기에 붙박여 있는 것이다. 입을 살짝 벌린 채 눈을 동그랗게 뜬 두상들. 하나같이 무언가를 갈구하는 표정이다. 게다가 무슨 까닭에서인지 연방 이리저리 흐느적거린다. 소름이 돋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작품이 먼지 세포를 형상화했다는 점이다. 화가 노진아씨는 “현대 기술로 들여다보지 못하는 미세한 세계의 유기체적 존재를 표현해봤다”라고 말했다. 미세한 먼지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세포가 보이는데, 그것을 나노 배율로 확대해 보면 ‘미생물’ 같은 형상이 보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시사IN 한향란장동수씨의 ‘생각의 지배’는 뇌 속의 여러 생각을 색깔로 표현한 작품이다.
사비나미술관에서 열리는 〈2050 퓨처 스코프:예술가와 과학자의 미래실험실〉(미래실험실·2월28일까지)에는 ‘미생물’처럼 과학과 미술을 결합한 작품이 여럿 있다. 전시회 이름에서 이미 눈치챘겠지만, 미래실험실은 과학과 미술의 통섭(統攝:학문 간 경계 허물기)을 목표로 한다. 물론 철저한 준비 절차를 거쳤다. 지난 12월 과학자 10명과 화가 13명이 네 팀으로 나뉘어 네 가지 주제(지구환경 변화, 뇌 과학, 시공간 초월, 나노 혁명)를 놓고, 배우고 토론하고 육화한 것이다.

물론 과학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은 노진아씨를 비롯한 화가들이다. 이들에게 지구환경 변화에 대해 설명한 박영무 교수(아주대·기계공학과)는 “예술가들이 핵무기, GMO 식품, 인간 복제 등으로 말미암아 과학에 덧씌워진 부정적 이미지를 바꿔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3개 층에 나뉘어 전시된 작품들을 보면, 화가들이 그의 소망을 귀담아들은 듯하다. 대개의 작품이 과학의 오묘하고 신비한 세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미래 지구의 동식물은 어떤 모습일까

길현씨의 작품 ‘나노 가든’을 보자. 이 작품은 두 개의 커다란 캔버스(1.5×2m)에 각각 검은색 요소(비료) 결정(結晶)과 붉은색 요소 결정이 펼쳐져 있는 그림이다(길씨는 소금·요소·설탕 등을 섞은 물감이나 먹물을 캔버스에 뿌린 뒤, 그것을 열선풍기로 증발시켜 만들어낸 다양한 모양의 결정으로 환상의 세계를 창조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물기가 마르는 며칠간 곰팡이처럼 자라기도 한다). 멀리서 보면 그의 그림은 수묵화나 원화를 짙게 활용한 추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림 옆에 가면 전혀 다른 느낌이다. 점만 한 기린이나 얼룩말 등이 뛰놀 것 같은 ‘마이크로 밀림’처럼 보인다. “결정의 입자는 나노 크기에서부터 눈송이 크기까지 다양하다. 그것으로 자연은 물론 우주까지 표현한다”라고 길씨는 설명했다. 과학자들이 나노의 세계를 수치로 보여준다면, 길씨는 색과 감성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미래 지구의 동식물을 구현한 이희명씨의 작품도 독특하다. 그러나 그 형상들이 보여주는 미래는 기이하고 음울하다. 꽃과 벌레를 결합시킨 작품(‘변형식물 시리즈’ ‘유충’ 등)이 있는가 하면, 손가락 토막이 기이한 애벌레로 변하는 작품(‘진화’)도 있다. 닭뼈와 생선뼈 등으로 창조한 이상야릇한 사람과 기묘한 생명체도 보인다. 왜 미래의 생명체를 이처럼 추하게 표현했을까. 이씨의 대답은 간단하다. “인간은 본래 추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현재에도, 미래에도….”

ⓒ시사IN 한향란이희명씨(위)가 상상하는 미래의 생명체는 추하고 기묘하고 음울하다.
‘뇌 과학’을 예술로 승화시킨 장동수씨의 설치 작품 ‘생각의 지배’도 이색적이다. 그는 연세대 해부학교실에서 일해왔는데, 그곳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해부용 시신의 두개골을 복제해보기도 했다. 그가 본 뇌는 생각보다 복잡 미묘했다. 그중 하나를 반으로 잘라 석고로 복제한 뒤, 인간의 복잡한 생각과 기억 등을 색깔로 표현해봤다. “뇌 속에 행복감과 불행감, 두려움 등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궁금했다.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장씨는 설명했다. 복제 뇌 25개에 투명 폴리로 빨간색·초록색·노란색·주황색 뇌골 등을 삽입한 뇌(‘생각의 지배’)는 오묘하고 아름다웠다.

인터넷 화상 통화 등을 이용해 ‘시공간을 초월’하는 시대. 예술가들은 이같은 시대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이현욱씨의 설치 작품 ‘이모셔널 드로잉(Emotional Drawing)’을 접해보면 어느 정도 가늠이 된다. ‘이모셔널 드로잉’은 관람자가 직접 작품을 완성한다. 일단 어두운 밀실에 들어가 플래시 라이트를 들고 스크린을 향해 움직인다. 그러면 빛의 궤적을 따라 스크린에 그림이 그려지고 묘한 음향이 발생한다. 시각과 청각으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 등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미적 욕구를 현대미술로 구현한 것.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예술도 하고 과학에도 정통한 사람을 ‘르네상스 맨’이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세분화한 현대에는 르네상스 맨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이렇듯 ‘통섭’의 뛰어난 결과물들을 보니, 르네상스 맨의 탄생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아직은 많은 관람객에게 어렵고 복잡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새로움이 주는 즐거움이 남으니 놓치지 마시라.

ⓒ시사IN 한향란길현씨(위)는 물감에 요소·소금을 섞은 뒤, 수분을 증발시키고 남은 결정으로 작품을 만든다.
기자명 오윤현 기자 다른기사 보기 nom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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