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서 길을 묻다’⑤ - 조한혜정에게 우석훈이 ‘문화적 상상력’을 묻다

우석훈 박사는 통기타를 들고 강연장에 들어섰다. 우 박사는 팝송 ‘레몬트리(Lem on tree)’와 김광석의 ‘일어나’를 불렀다. 조한혜정 교수는 청중에게 ‘레몬트리’ 영어 가사를 한글로 해석해 불러줬다. 시작부터 분위기가 자유로운 강연이었다. 2시간30분 동안 두 강사와 청중은 “상상력은 어떻게 해서 생기나?”를 묻고 답했다.

ⓒ시사IN 한향란조한혜정 교수(왼쪽)와 우석훈 박사(오른쪽)는 “문화적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선 겁을 버려라”고 주문했다.
우석훈(우):상상력을 주제로 어떤 이야기를 풀어나갈지 고민스러웠다. 내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공부하거나 글을 쓸 때 자주 처지를 바꿔 생각해본다. 아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거나 혹은 (아직 아기는 없지만) 딸의 처지에서 상상해본다. 요즘엔 바다의 눈을 통해 글을 한번 써보고 있다. 사람들은 바다를 배의 눈으로 본다. 반대로 바다 처지에서 범선을 보면 어떨까. 해양 사막화가 가장 심한 나라가 한국과 영국이다. 한국 바다는 죽어가는 중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들이 안전하게 처리된다고 생각들을 하는데, 사실 많은 양이 바다에 버려진다. 울산 앞, 부산 앞, 제주도 앞 바다 세 군데가 쓰레기장인데 정확한 위치는 비밀이라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생각했다. 내가 바다라면 내 안의 사막화가 어떻게 보일까. 예전엔 지율 스님의  투쟁을 보면서 도롱뇽이 되는 상상도 해봤다.

사람들은 이런 상상을 잘 못하는 것 같다. 그 이유가 겁에 질려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만난 일본인과 한국인을 비교해보면 평균적으로 한국인이 훨씬 겁에 질려 있다. 초등학생을 만나면 아직은 겁에 질리지 않았다는 걸 느낀다. 우리나라에선 열세 살부터 겁에 질리기 시작한다. 한국에서 13세는 바로 커피 중독이 시작되는 나이다. 어디서 커피 중독이 되느냐, 바로 학원가에서 시작된다. 학교엔 커피 자판기가 없지만 학원에는 있다. 열세 살 아이가 과외하고 학원 다니면서 밤 10시, 11시를 훌쩍 넘긴다. 학원 쉬는 시간에 “아, 피곤하다”면서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빼어 마신다. 그때가 되면 겁에 질리기 시작하는 것 같다. 겁을 어떻게 떨칠 수 있을까? 조한혜정 선생님은 내가 본 여성 가운데 가장 용기  있는 여성이다. 큰 적을 앞두고도 쉽게 ‘쫄지’ 않으신다.

조한혜정(조한):우석훈 선생님 역시 쉽게 겁을 먹지 않는 분이다. 겁이 없으면 판을 읽을 수가 있다. 관찰력도 겁이 없어야 생긴다. 도룡뇽이 되려 해도 관찰을 해야 한다. 어릴 때부터 자기를 이탈해서 관찰하는 것, 이게 바로 겁에 질리지 않는 여유 아닐까. 우 선생과 얘기를 해보니 이분이 학창 시절 학교를 별로 안 다녔더라(웃음). 졸업은 다 했는데 이상하게 학교를 별로 안 다니셨다. 정말 좋은 학교였나 보다. 지금 같으면 쫓겨났을 텐데, 재수가 좋았나 보다(웃음). 그때 얘기좀 해달라.

:처음으로 학교를 가지 않은 게 초등학교 3학년 때다. 꾀병을 부려봤다. 한번 통하니 그 다음부터는 무조건 아프다 하고 가지 않았다. 고등학교 땐 아예 선생님한테 자를 거면 자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도 다행히 선생님께서 도서관 열쇠를 주셔서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학교 도서관에서 살았다. 수업에 들어가면 어차피 자니까 선생님이 그렇게 봐주셨나 보다.

조한:저도 학창 시절에 꾀병을 자주 부렸다. 날씨가 좋지 않거나 머리가 조금 아픈 것 같으면 집에서 책 보고 그랬다. 요새도 학회에 가면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분들이 계시고 나같이 10분 정도만 듣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 상상력을 만들려면 룰을 꼭 지키면 안 되는 것 아닐까. 아파서 누워 빈둥거리며 관찰하고 망상하던 게 참 유익했구나 생각한다. 일본의 학교는 양호실이 정말 좋다. 양지바른 곳에 넓은 침대가 놓여 있다. 우리도 그렇게 하고 꾀병 늘리면 안 될까. 그런데 그게 맘대로 되긴 어렵다. 엄마들이 싫어하니까.

“좌파에겐 명랑함이 필요하다”

:절망이라는 단어가 절실하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미국의 리베카 솔닛이라는 아티스트가 4년 전쯤 〈어둠속의 희망〉이라는 책을 썼다. 부시가 재선에 성공한 직후, 진보 운동가인 저자는 진짜 괴로워서 이 책을 냈다. 한국의 진보 운동가 처지에서 보면, ‘지금 우리 상황과 딱 맞아떨어진다’고 느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남은 임기 4년을 다 채우고 나면 그 다음엔 왠지 박근혜 의원이 할 것 같고, 그 다음에는 이재오씨가 할 것 같은 절망적인 시기거든(청중들 “어우~”). 리베카가 바로 그런 시점에 “그래도 우린 이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여러분, 극우 단체 싫죠? 리베카는 상대가 극우 단체라 할지라도 뜻이 같다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함께 움직여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댐 건설을 막고 생태를 복구하자는 환경운동이 성공한 동네는 바로 백인우월주의자 단체와도 연대한 동네다. 극좌든 극우든 동네 환경을 지키자는 뜻만 같다면 함께하는 게 가능하다. 한국은 ‘우리끼리’를 너무 강조한다. 생각의 틀이 좁다. 우정과 환대의 정신은 진보와 좌파에게 더 필요하다. ‘난 어려워도 명랑하긴 할 거야’, 이런 정신. 극우 단체와도 함께하려면 명랑·우정·환대가 넘쳐야 한다.

조한:여성운동 하면서 ‘여성운동이 그동안 너무 적대와 경쟁의 논리로만 움직였구나’ 하고 많이 느꼈다. 남자들을 많이 괴롭히고 놀라게 했다. 성매매자 명단 공개, 성희롱 캠퍼스 재판 같은 것이 그렇다. 초반엔 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았는데 ‘그 과정에서 좀 더 우정과 환대라는 게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정과 환대가 거창한 게 아닌데 말이다.

:한국에서 농촌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의 감성으로 볼 때, 도시 빈민으로 사는 건 굉장히 피곤한 일이다. 똑같이 가난해도 도시 빈민과 농촌 빈민은 다른 것 같다. 농민에겐 ‘배고프다’와 ‘가난하다’가 동의어가 아니다. 먹고는 산다. 하지만 도시의 가난은 배고픔이다.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에 나오는 것 같은 치사하고 비참한 생활이다. 그러면서 마음도 더 황폐해진다. 도시에 살더라도 농촌의 감성을 지닐 방법이 있을까?

조한:안정의 기반이 중요하다. 외환 위기 때 그나마 친척이 시골에서 쌀을 보내줘서 굶지는 않았던 도시 빈민이, 이제는 쌀 보낼 친척도 다 서울에 올라와 같이 힘들어지고 배고파진다. 일본 영화 〈홈리스 중학생〉을 본 적이 있다. 중학교 3학년 아이가 어느 날 학교 갔다 집에 오니 아버지가 ‘우린 망했으니 각자 알아서 살자’고 한다. 그때부터 아이는 놀이터 미끄럼틀에서 자면서 거지 생활을 시작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날 법한 이야기다. ‘하자(청소년문화 센터)’에서 만나는 친구들만 봐도, 요새 아이들은 친한 친구가 있어도 솔직한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종이를 주워 먹고 죽을 판이 되어도 혼자 끙끙 앓는다.

일본에 굶어죽는 사람이 많다. 실제로 찾아가면 죽을 만큼 가난하지는 않다. 굳이 살고 싶지 않은 것 아닐까. 그런 현상을 보며 어떤 식으로든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혼자’가 아닌 ‘같이’가 중요하다. 유럽 사회는 애완견과 함께 살거나 혼자서 사는 게 익숙하다. 우리나라에선 혼자 잘살면 병리적으로 본다. 나는 그게 바로 희망이라 생각한다. 혼자 사는 걸 정상으로 보지 않고 좋든 싫든 같이, 함께 존재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 베이스를 만드는 게 농사다. 요즘 성미산학교처럼 도시와 농촌이란 이분법을 깨뜨리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문화라는 키워드를 좀더 많이 썼으면 좋겠다. 한국 사회에서 문화를 진짜 문화답게 얘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문화 마케팅이니 한류 문화니 그런 얘긴 했는데, 문화 속에 사는 게 뭔지 우린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문화 소비자로만 살아왔다. 마케팅 사회에서 문화의 이미지는 ‘돈 내라’는 것뿐이다. 돈내고 그림 사라는 게 문화다. 생산자처럼 돼야 문화가 꽃핀다. 고등학생 중에는 문화 생산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진 친구가 많다. 대학생들은 벌써 감을 잃었다. 대학 수업에서 그런 얘기를 하면 다들 잔다. ‘현대그룹 잠깐 다녔다’ 따위의 얘기를 하면 눈이 반짝이는데, 곧이어 문화 어쩌고 하면 자더라.

문화의 시대가 오긴 올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 집단의 문화적 ‘어글리함’을 본 뒤 문화 취향이 세련되어지지 않을까? 못생긴 것보다 예쁜 것 보고 싶은 게 사람 심리다. 같은 〈심청전〉을 인간과 신들이 각각 극장에서 영화로 본다고 상상해보자.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지는 순간, 인간들은 울고 신들은 박수친다. 신 처지에서 보면 ‘드디어 심청이가 더러운 인간 세상에서 벗어났구나!’ 하고 기뻐할 수 있다. 이렇게 뒤집어 생각할 수 있다. 문화도 결국 부흥할 거다. 시대가 괴로우니까. 텔레비전 보면 괴로우니 극장에 갈 것이고, 극장마저 괴로워지면 결국 책을 볼 것이다.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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