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 PhotoBBC가 재난긴급위원회가 제작한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인 돕기 구호 광고’를 방영하지 않자 BBC 사옥에서 연좌 농성을 벌이는 시위대.
눈과 머리에 붕대를 맨 아기가 울고 있다. 핵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폐허가 된 시가지를 뒤로하고 시신이 줄지어 놓여 있고 유족은 오열한다. 클로즈업된 한 여자아이의 눈에 눈물방울이 맺힌다. 그리고 내레이션이 흐른다. “지금 이건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질 문제가 아니다. 이 아이들에게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국제자선단체 재난긴급위원회(DEC)가 제작한 이 3분10초짜리 광고 한 편이 영국 사회를 들끓게 하고 있다. 이 동영상 광고는 최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피해를 당한 팔레스타인 사람을 돕기 위한 구호 활동 기금을 마련하려고 만들었다. 1월22일 처음 공개됐다.

하지만 어떤 까닭에서인지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세계적으로도 이름 있는 방송사인 BBC는 이 광고 동영상을 방송해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 그간 DEC는 세계 각지에서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돕기 위한 광고를 만들어왔고, 방송사는 기꺼이 이 광고 방송을 수용해왔다. BBC의 결정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BBC가 광고 송출을 거부한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 결정은 대중을 흥분케 했다. 전직 장관을 포함한 유력 정치인과 유명 인사, BBC 직원들은 태도를 바꾸라고 요구하며 항의하기 시작했다.
BBC 마크 톰슨 사장은 BBC가 정치적 중립성을 확고히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며 광고 송출 거부 결정을 옹호했다. DEC의 이 팔레스타인 돕기 동영상 내용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어느 한쪽을 편든다는 것이다. BBC의 이런 태도는 영국 민영방송 ITV와 스카이가 DEC 광고를 거부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과거 영국인들은 대체로 BBC를 존중하는 편이었지만, 이번 경우 여론은 BBC와 다른 쪽이었다. 지난 1월24일 토요일까지 런던 거리에서 벌어진 BBC 반대 시위에는 수천 명이 참가했다. 여론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민영방송 ITV와 채널 4는 애초 결정을 뒤집고 팔레스타인 돕기 광고 방송을 허락했다.

ⓒPeter Marshall영국에서 영향력 있는 정치인인 토니 벤 전 장관(가운데)이 BBC 앞에서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BBC가 이스라엘의 압력에 굴복했다”

영국에서 영향력 있는 정치인인 토니 벤 전 장관은 BBC의 라디오 뉴스 프로그램 〈투데이〉와 가진 인터뷰에서, BBC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BBC가 이스라엘의 압력에 굴복했다며 “우리 영국 시민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릴 기회가 있는데도 그들이 죽어가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BBC에 불리할 수도 있는 이런 인터뷰가 BBC 뉴스 프로그램에서 나왔다. BBC 기자들은 자사의 이해가 걸린 이번 스캔들을 여론의 동향과 함께 자세히 보도했다.

영국에서 최근 영향력이 커지는 유력 일간지 가디언은 자사 홈페이지에 대대적으로 이 동영상을 띄웠다. ‘BBC가 거부한 광고’라는 설명이 달렸다. ITN(독립방송 뉴스) 따위의 언론사 홈페이지에 DEC의 홈페이지를 연결한 링크가 등장했다. 심지어 1월26일 월요일에는 영국 총리의 공식 홈페이지(10 다우닝 스트리트)도 DEC 홈페이지를 링크해놓았다. DEC 홈페이지에는 당연히 이 팔레스타인 돕기 동영상이 떠 있다.

역설적이게도 팔레스타인 돕기 동영상을 방송하지 않기로 한 BBC의 결정이, DEC가 의도한 광고 효과보다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분노한 시민들이 기금 기부에 적극 나선 것이다. 1월27일 모금된 기부액은 100만 파운드(약 20억원)에 이르렀다. 일주일 뒤, 광고액은 300만 파운드를 넘었다. BBC 광고 거부 소동이 있은 뒤 2주가 지난 2월5일까지 이 기금은 400만 파운드를 돌파했고,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국제 정치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광고를 둘러싼 홍역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홍보전쟁 양상을 바꾸었다. 그동안 국가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의 홍보 기관들은 고도로 조직화해, 서방 세계로부터 우호적 여론을 이끌어내는 작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했다. 아랍 세계의 반복되는 위협 때문에 이 우호적 여론은 수년간 강화되어왔다.

하지만 지금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충분히 국가와 시민을 보호할 수 있는 데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의문을 일으키면서 대중의 여론이 바뀌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약자를 동정하고 권력자에게 비우호적이다. 팔레스타인은 지금 명백히 약자다.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는 이 사실을 교묘히 이용한다. 하마스의 홍보 작전은 요 몇 년 사이 주목할 만한 정도로 발전해왔다. 잘 훈련된 기자와 카메라맨이 현장에서 취재한 자료는,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는 세계 각지의 뉴스 채널에 전달된다.

DEC 팔레스타인 돕기 광고 거부 소동을 둘러싼 영국 전역에 걸친 대논쟁은, 최근 달라져가는 이스라엘에 대한 서방세계의 여론을 반영한다.

BBC의 광고 거부 결정은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마스의 선전 도구가 되지 않으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하마스에게 좋은 선물을 줬다. 온라인 블로그상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거리에는 시위가 커져가고, 정치 공방도 치열하다.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와 각종 언론사 홈페이지에 게재된 이 동영상 조회 수는 BBC 광고 예상 시청자 수보다 훨씬 더 많다. 광고를 하려는 쪽에게 ‘사회적 논란’은 마치 산소와 같은 것이다.

번역: 신호철 기자

기자명 런던·필립 헌트 (언론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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