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동안 전화번호를 여섯 개나 외웠다. 전화번호를 찾느라 매번 수첩을 펼쳐보는 게 번거로워서 그날그날 필요한 전화번호를 해마에 입력한 것이다. 휴대전화를 ‘장착’한 1997년 이래 일부러 전화번호를 암기한 적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막 뇌에 들어온 숫자 열 개가 마치 생물처럼 위치를 뒤바꾸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타박하다가 문득 지난해 취재한 ‘기네스북에 오른 기억력 천재’ 에란 카츠가 떠올랐다.

카츠는 10여 초 만에 숫자와 알파벳 40여 개를 줄줄 외우는 이스라엘의 두뇌 전문가.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하냐는 질문에 그는 “숫자를 구체적으로 재미있게 상상해서 기억하면 된다”라고 말했다. 가령 36이라는 숫자를 외울 때는 서른여섯 살 노총각, 36번지 주택 등을 떠올리며 외우라는 말이다. 그의 책 〈슈퍼 기억력의 비밀〉에는 숫자를 영어로 치환해 암기하는 방법도 나와 있다. 숫자 1을 T, 2를 N, 3을 M, 4를 R, 5를 L, 6을G… 하는 식으로 정한 뒤, 모음(a·e·i·o·u)을 이용해 숫자 여러 개를 단어로 만드는 것이다. 예컨대 21은 Not로, 41은 Rat로….

전화번호 두 개를 영어 단어로 조합해 외워보았다. 영어에 익숙지 않은 탓일까, 속도가 더뎠다. 결국 에란 카츠의 비법을 밀쳐두고 그냥 날것으로 외워보았다. 오오, 다행히 아직 머리가 꽤 쓸 만했다! 바빠진 것은 머리뿐만이 아니다. 몸도 분주해졌다. 약속 시간에 늦으면 연락할 방법이 없다 보니 팔다리를 재게 놀려 시간을 지키는 것이다. 때로는 공중전화를 찾느라 노루처럼 뛰어다니기도 한다. 눈도 다망해졌다. 전철이나 버스에서 휴대전화 대신 책장을 맹렬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전화 거는 사람들, 더 불편해해

뜻밖에 “정겨워졌다”는 소리도 듣는다. 문자나 휴대전화로 연락할 일을 (전화번호를 몰라서) 인터넷 쪽지나 메일로 전하다 보니, 사연이 길어지고 말이 구수해진 덕이다. 구석에 처박아둔 명함을 뒤적이다

ⓒ시사IN 백승기구석에 처박아둔 명함을 꺼내 잃어버린 전화번호를 복구하고 있다.
가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즐거움도 맛본다. 10여 년간 연락 두절되었던 사람의 명함을 발견하고, 거기에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해 ‘극적인 접속’에 성공한 것이다.

휴대전화를 끊기 전에는 휴대전화가 없으면 무척 불편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인간관계가 띄엄띄엄해서 그런지 아직까지는 별 불편 없이 지낸다. 취재원과 접선하기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 출발 전에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확히 확인한 뒤 조금 앞서 출발하니까 급하게 전화 찾을 일이 없다. 물론 내게 전화를 거는 사람들의 지청구와 원성은 여전하다. 간신히 연락이 되면 하나같이 “불편해 죽겠다. 빨리 휴대전화 살려라” 라고 말한다(이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새삼 촘촘한 네트워크 그물에 갇혀 있음을 확인한다).

가끔 예상 못한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며칠 전 공교롭게 약속이 한 시간 간격으로 두 개나 잡혔다. 게다가 약속 장소로 이동하는 중에 살펴보니 보도 자료에 적혀 있는 한 전시회의 기자간담회가 두 번째 약속 시간과 겹치는 게 아닌가. 미술관에 기자간담회 시간과 장소를 확인하고, 그 내용이 맞다면 두 번째 약속을 취소해야 했다. 공중전화를 이용해 두 번째 약속자에게 사정을 알리려 했는데 어라, 전화카드도 동전도 없었다. 나중에 알려야지 했는데, 결국 약속 시간 10분 전에 겨우 연락해 타박만 잔뜩 들었다.

휴대전화를 끊고는 며칠 동안 고독이 밀려와 외로웠다. 하지만 인터넷 쪽지와 메일 그리고 명함 덕에 유선 연락이 가능해지면서 외로움이나 소외감은 거의 달아났다. 그런데 최근 그 틈을 한 가지 의문이 비집고 들어왔다. ‘이 촘촘하게 짜인 네트워크 안에서 휴대전화가 없다는 것은 행복일까, 불행일까?’

기자명 오윤현 기자 다른기사 보기 nom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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