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가 이끄는 달구지 안에서 할아버지는 종종 잠이 든다.
〈워낭소리〉 이충렬 감독(43)이 ‘아버지’를 소재로 다큐멘터리를 찍겠다고 결심한 건 1997년 외환위기 때였다. 경북 봉화의 노부부와 소를 찾는 데 5년, 그 셋을 카메라에 담는 데 3년, 방송용 다큐멘터리가 영화관에 내걸리기까지 2년이 걸렸다. 다 합쳐 10년이 훌쩍 지났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상은 다시 10년 전과 비슷해졌다. “기획하자마자 개봉한 격이다”라며 웃는 이 감독을, 〈워낭소리〉가 국내 다큐 영화 최고 흥행 성적을 돌파한 2월4일 배급사 ‘인디스토리’ 사무실에서 만났다.    

〈워낭소리〉를 본 관객이 10만명이 넘는다. 10만이란 숫자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내 영화가 관객과 소통되는 부분, 공감이 축적되는 모습이 이제 수치로 나타나고 있구나’ 하는 정도로 본다. 사실 영화계에서 500만, 1000만 관객도 경험해놓고 관객 10만명 왔다고 놀라는 건 참 아이러니다. 독립영화를 10만명이나 보러 왔다고 난리법석 놀라는 모습이 오히려 독립영화의 슬픈 현실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전 독립 다큐와 〈워낭소리〉는 뭐가 다른가?사실 그동안 독립 다큐는 너무 딱딱했다. 감독의 주관적인 작품이 트렌드가 되다 보니 무겁고 지루해져 관객들이 다큐를 기피했다. 〈워낭소리〉는 순전히 관객 입장에서 기획하고 만들었다. ‘내가 느끼는 정서가 남과 다르지 않다’고 자기 자신에게 부메랑이 돌아오는 작품이 되기를 노렸다. 이런 게 관객에게 먹히지 않았을까.

영화는 느릿한데 현실에서는 속도전이 한창이다.지금 우리는 실용·효율·속도를 중시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효율과 실용은 빠른 가치 판단을 요구한다. 경제 법칙에 따라 유용하면 취하고 아니면 버리고. 그 속에서 도덕 같은 건 설 자리가 없다. 물론 우리 생각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일부 정치인의 생각이다. 〈워낭소리〉에 나온 할아버지는 이와는 철저히 정반대로 산다. 마흔 살 된 소도 버리지 않고 농약 뿌리지 않고 기계 쓰고. 이런 부분들이 관객에게 와 닿은 듯하다.

할아버지와 소를 찾으러 5년을 돌아다녔다고 했는데, 스토리나 이미지를 이미 구상해놓고 거기에 맞는 캐릭터를 찾아다닌 건가. 짜고 친 연출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외환위기 당시 아버지에 관한 다큐를 찍고 싶다는 생각을 한 뒤, 어떤 아버지를 할 것인가 오랫동안 고민했다. 일단 내 기억 속의 아버지를 찾았다. 늘 밭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항상 딸려오는 게 소다. 성질·품성 여러 모로 소와 아버지가 너무나 닮았다. 그런데 무작정 소와 아버지를 할 순 없잖은가. 그래서 쇠락한 고향을 닮은 소와 아버지의 모습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낡고 장애를 가진 이들을 찾고자 했다. 함께 내리막길에 있는 둘이 서로 상대에 대한 헌신을 더 잘 보여주리라 생각했다. 그런 속성을 지닌 캐릭터를 찾아다닌 경향은 있다. 다큐의 성공 여부는 캐릭터니까.

주인공 할아버지는 어떻게 찾았나?독립 PD로 활동하면서 텔레비전의 〈6시 내고향〉 같은 지역 프로그램을 많이 찍다 보니 네트워크가 생겼다. 이장님이나 축협 관계자들에게 아직 소달구지를 타고 다니는 아버지를 수소문했다. 기계가 들어가지 못하는 다랭이논이 있는 남해나 함평·지리산·안도 등 곳곳을 돌아다녔다. 2004년 말인가 2005년 초에 봉화축협에서 전화가 와서 할아버지를 소개해줬다. 다 떠나가고 집 한 채 남은 쇠락한 마을, 최원균 할아버지네를 보고 든 첫 생각은 ‘심란하다’였다. 마당에 장작이 막 어지럽게 놓여 있고 저쪽에선 소랑 할아버지가 같이 꾸벅꾸벅 졸고 있더라. 그걸 보고 ‘아, 찾았다’고 생각했다.

ⓒ시사IN 한향란이충렬 감독(위)은 ‘관객 10만명 돌파’가 뉴스가 되는 것 자체가 독립영화계의 슬픈 현실이라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선뜻 촬영에 응해주던가?할아버지와는 의사소통이 잘 안 된다. 귀가 어둡기도 하시고, 사투리 때문인지 우리와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봉화의 한 학교 미술교사인 아드님에게 말씀드려 승낙을 얻었다. 할아버지나 나나 소가 오래 살아봤자 1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오래가니 마찰도 생겼다. 할아버지는 일하는 걸 방해받으니 우리가 자꾸 찾아오는 걸 싫어하셨다. 오히려 그 덕분에 지금의 〈워낭소리〉 영상이 나왔다. 의사소통이 안 되니 다큐의 방법인 인터뷰 안 되지, 할아버지 표정 관리 안 되지, 느릿느릿 할아버지 호흡대로 움직이니까 핸드헬드로 카메라 휘두를 수도 없지. 4∼5개월 죽 지켜보니 할아버지 일상과 동선이 보였다. 그리고 더 지나니 관계라는 게 보였다. 처음엔 할아버지와 늙은 소의 관계, 그 다음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관계, 나중에 젊은 소가 들어오면서 또 4각이 생기고 새로운 갈등이 생기는 식으로. 이런 갈등을 단층처럼 쌓아나가면 시간의 무게가 깊어질수록 관계의 단층이 더 높이 쌓이겠다고 생각했다. 소가 사라지는 날 그 관계들이 깨지는 건데, 그때 또 어떤 효과가 나올 것인가 기대됐다.
영화에서 소 숨소리부터 집회 구호 소리, 트랙터 소리까지 많은 소리가 들리더라.할아버지 영토 안에선 할아버지다움이 필요한데, 그게 소리로 나타난다. 할아버지 공간엔 새소리, 할머니 잔소리, 워낭 소리도 있고 또 다른 소리, 할아버지 공간에 있는 농기계 소리 같은 문명의 소리도 있다. 이렇게 비문명의 공간과 문명의 공간이 충돌할 때가 있다. FTA 반대 시위 장면 같은 경우, 할아버지 삶에 있는 엄연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려 했다. 누가 연출했느냐고 계속 묻는데, 2006년도에 한창 시위 하던 때 찍었다. 할아버지의 공간에 있는 비문명적인 부분과 문명, 이 두 가지가 부닥쳤을 때 어떤 효과가 날까 하며 그걸 이용한 점은 있다. 할아버지는 FTA, 이런 것 잘 모른다. 시위 장면은 할아버지 삶에 그저 스쳐 지나가는 풍경 중 하나다. 할아버지에겐 문명은 구경의 대상이다. 그때 발생하는 이상한 마찰, 그걸 노렸다.

촬영 틈틈이 일은 도와드리지 않았나?일 도와주는 걸 할아버지가 싫어하신다. 할머니한테도 자기 할 일은 시키지 않는 분이다. 아주 고집스럽다. 그리고 촬영할 때 계속 두 분과 거리를 두려 했다. 그 집에서 밥도 먹지 않고 다른 데서 잤다. 너무 친해지고 가까워지면 사심이 들어가 그때야말로 진짜 조작을 할 수도 있다.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바라보려 했다.

영화에서 특히 마음에 드는 장면이 있나?할아버지와 소가 함께 나무를 나눠 지고 걷는 장면이 좋다. 소설가 펄 벅이 한국에 와서 사람이 소의 짐을 나눠 지고 오는 장면을 보고 놀랐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소가 힘들까 봐 나눠 지고 가는 거지. 할아버지가 바로 그랬다. 할아버지의 의외성 중 하나가 나무를 할 때 아까시나무만 벤다는 거다. 식민지를 경험한 할아버지는 아까시나무를 일본인이 심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그것만 베는 거다. 그 장면을 넣고 싶긴 했는데, 그러면 너무 할아버지를 특화하고 영웅화하는 거 같아 뺐다.

영화에 나온 늙은 소와는 교감을 했나?어릴 때 시골에서 자라 소를 많이 보긴 했다. 소를 타고 다니기도 하고, 일상이 소와 함께였다. 영화에서 소가 우는 장면이 있는데, 연출이 아니다. 소는 진짜 운다. 소가 있어야 대학갈 수 있던 시절, 아버지가 소를 팔려고 직접 장에 끌고 간 적이 있다. 팔릴 때 소가 정말 울었다. 아버지도 눈물을 훔치며 우셨다. 지금도 우시장 가면 흔히 볼 수 있다. 소가 우는 건 기적이 아니다.

끝까지 소도 팔지 않고 일도 하겠다는 할아버지 마음이 이해가 되던가?할아버지는 소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소가 없으면 자기도 없다고 생각한다. 우시장에서 사람들이 이 소는 고기도 못 먹는다느니 60만원도 못 받는다느니 말할 때 500만원을 부른 건 자기 자존심이었다. 소달구지를 타고 우시장에 갔다는 것도 할머니와 자식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반항 제스처 아니었을까. 할아버지한테 물으면 늘 그런다. “참 불쌍한 소야.” 더 이상 얘기가 진전되지 않는다. 어쩌다 한마디 더 하면 “이 소가 차를 피해요” 이거다. 수의사를 봐도, 마을에 가도 늘 저 말씀만 하신다. 내가 할아버지 그 마음을 어찌 알겠나.

혹시 채식주의자인가?채식주의자는 아닌데 고기를 거의 먹지 않는다. 영혼을 맑게 하기 위해 오로지 술만 마신다(웃음). 영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사실 요새 인터뷰하고 방송 나오는 게 심적 부담이 크다. 예전에 작품이 잘 안 될 때 나타나던 공황장애도 다시 경험한다. 까발리고 발가벗겨진 느낌이 든다. 난 원래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 원래 방 안에 가만히 있는 스타일이다. 나 같은 사람이 일본에 많다더라. 이런 상황 미치겠다(웃음).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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