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한 사람의 일생을 통째로 담겠다는 건 대개 욕심이다. 그 사람이 요절한 천재가 아니라면 관객들 시름은 더 깊어진다. 섬광처럼 짧게 살다간 이야기를 2시간 안팎으로 요약하기도 쉽지 않은데, 유성 꼬리처럼 길게 천수 누리다 간 사람 이야기를 어찌 감당할 텐가. 행여 그런 시나리오를 써보겠다는 작가가 있다면 조용히 어깨  감싸쥐며 이렇게 속삭이고 싶어진다. “집어치워. 그게 될 것 같아?” 그런데 아뿔싸! 그게 된다. 겨우 2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흥미진진한 팔십 평생을 꾹꾹 눌러 담은 이야기. 한 사람의 일생을 통째로 담겠다는 건 대개 욕심이지만 때때로 이렇게 멋지게 실현되는 야심일 때도 있다.

이건 나이를 거꾸로 먹는 사람 이야기다. 태어날 때 여든 노인의 육신으로 태어난 남자가 결국 갓난아이가 되어 죽는 이야기.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구상한 건 미국 소설가 F. 스콧 피츠제럴드다. 우리에게 〈위대한 개츠비〉라는 고전을 선물한 이 양반이 1920년대 발표한 단편소설에서 ‘나이 거꾸로 먹는 남자 이야기’를 처음 꺼낸 모양이다. 그가 쓴 농담 같은 이야기에서 뼈대만 가져온 뒤 엄청난 ‘구라’를 살점으로 덧붙여 영화로 만든 게 바로 이 작품. 처음 영화로 만든다고 했을 때, ‘집어치워. 그게 될 것 같아?’ 따끔하게 충고하지 못한 건 시나리오 쓰는 사람이 에릭 로스였기 때문이다. 〈포레스트 검프〉를 쓴 작가라면 한 사람의 일생 통째로 그려내게 내버려두어도 되겠다 싶은 게 당연하다.

에릭 로스가 덧붙인 살점은 이렇다. 1918년 어느 날, 벤자민(브래드 피트)이라는 아이가 태어난다. 괴물 같은 모습에 기겁한 아버지는 아이를 한 양로원 계단에 버리고 달아난다. 마음씨 좋은 양로원 직원이 아이를 거두어 정성껏 키운다. 백내장에 관절염까지 앓던 갓난아이가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젊어지고 멀쩡해지더니, 잘생긴 중년을 거쳐 멋진 꽃미남으로 ‘성장’해 간다. 하지만 날로 회춘하는 자신을 보며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다. 사랑하는 여인 앨리스(케이트 블랜쳇)가 반대로 점점 늙어가기 때문이다. 여자가 마흔을 넘기고, 남자는 마흔 이전으로 젊어지던 무렵의 어느 날. 여자가 묻는다. “자기는 내 늘어진 살을 사랑할 수 있어?” 남자가 답한다. “당신은 내 여드름을 사랑할 수 있어?” 농담 같은 이야기에 가슴 아픈 현실이 담겨 있다. 두 사람은 남들처럼 ‘함께 늙어가는 행복’을 영원히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함께 늙어가는 행복’ 누릴 수 없는 불행

일종의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이가, 남들이 뭐라 해도 자기 편 들어주는 어머니 품을 떠나서, 전쟁과 여행을 겪으며 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경험한 뒤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는 설정만 빼면 줄거리는 작가의 전작 〈포레스트 검프〉와 비슷하다. 하지만 감독의 전작과는 하나도 비슷하지 않다. 〈세븐〉 〈파이트 클럽〉 〈조디악〉처럼 어둡고 비관적인 영화를 줄곧 만든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이번에는 작심한 듯 애틋하고 안타까운 러브 스토리를 찍었다. 그것도 아주 잘 찍었다. 단지 얼굴만 뜯어먹고 사는 배우가 아니란 걸 보여준 브래드 피트는 젊고 잘생긴 벤자민을 연기할 때, 주인공의 여자 친구 그 이상의 무엇으로 캐릭터를 살려낸 케이트 블랜쳇은 나이 먹은 앨리스를 연기할 때 더욱 빛난다.

〈뉴스위크〉의 표현대로 이 영화는 ‘특이하면서도 보편적’이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게 특이하지만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 보편적이다. 벤자민이나 우리나 자기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보편적이다. 그래서 안타깝지만 그래서 더 흥미롭다. 영화도, 인생도.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