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패트릭 셰인리 감독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정치인들이 토론하는, 말하자면 〈100분 토론〉 같은 프로그램 말이다. 각자 다른 확신에 찬 그들이 고함치며 논쟁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감독은 이런 생각을 했다. “그들은 어떻게 저렇듯 확신하게 되었을까? 모두 나름대로 견고한 의견을 지녔는데, 실제 한 번이라도 서로 진정한 교류를 해본 적이 있을까?”

감독은 ‘의심’이야말로 세상을 소통 불가의 지옥으로 만든 진짜 범인이라고 봤다. ‘잘못된 확신’을 초래하는 ‘확고한 불신’의 작동 원리를 밝혀내고 싶었다. 그래서 연극을 한 편 써서 무대에 올렸고, 제목은 자연스럽게 ‘의심(다우트: doubt)’이 됐다. 2005년 퓰리처상과 토니상을 휩쓸면서 전세계 연극판을 뒤흔들어놓은 이 문제 작품. 급기야 지난해 영화로도 만들었다. 사람들은 ‘연극쟁이가 과연 영화도 잘 찍어낼까?’라고 내내 그 실력을 ‘의심’했지만, 이 연극을 영화로도 가장 잘 만들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확신’에 물러서지 않았다. 다행히 그의 확신은 빗나가지 않아, ‘의심할 여지 없는’(!) 근래 가장 논쟁적인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야기 배경은 1964년이다. 미국 사회 곳곳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대던 그 무렵,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는 가톨릭 교단도 그 바람을 피할 수 없다(실제로 영화에서는 중요한 순간마다 세찬 바람이 자주 분다). ‘가족 같은 교회’를 부르짖는 열정적인 플린 신부(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와 ‘감시와 처벌’의 가치를 신봉하는 수녀원장 알로이시스 수녀(메릴 스트립)의 대립. 그 위태롭던 힘의 균형이 깨진 건 어느 날 막내 수녀 제임스(에이미 애덤스)가 수녀원장을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으면서부터다. 이들 교구에서 관리하는 가톨릭계 학교의 흑인 남학생에게 신부님이 ‘부적절한’ 관심을 쏟는 듯하다는 제임스 수녀의 ‘의심’은 즉시 수녀원장의 ‘확신’으로 바뀐다. 자신의 단호한 도덕적 확신 외에는 아무런 증거도 없으면서 오직 견고한 의심의 함정에 밀어넣는 것만으로도 신부를 궁지로 모는 데 성공하는 수녀원장. 그건 정말 근거 없는 확신에 불과할까, 아니면 한번 해볼 만한 의심일까? 진실은 쉽게 밝혀지지 않고 관객도 쉽게 어느 한 편에 설 수 없게 된다.

일단 배우들부터 칭찬하고 보자. 올해 아카데미 영화상에 메릴 스트립을 비롯한 남녀 주·조연 배우 4명이 한꺼번에 후보에 올랐을 정도라면 말 다했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고 말들 하지만, 때때로 영화는 온전히 배우의 예술이기도 하다는 점을 이 영화가 증명한다.

좋은 질문과 어려운 숙제를 던지는 영화

그럼에도 이 영화 보고 짜증내는 사람들도 봤다. 플린 신부가 어린 남학생에게 부적절한 관심을 쏟은 건지 아닌지,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는 결말 때문이다. 재수없는 ‘꼰대’ 수녀원장이 패배하는 꼴을 봐야 직성이 풀릴 텐데 야속하게도 감독이 그 직성을 풀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혹시 당신 안에도 수녀원장 같은 인간이 숨어 있는 게 아니냐고 째려보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감독은 처음부터 그걸 노렸다. 우리는 〈자유로운 세계〉를 보면서 ‘내 안의 이명박’과 싸웠듯이 〈다우트〉를 보면서는 ‘내 안의 수녀원장’과 싸워야 한다. 그건 몹시 짜증나는 일이지만, 세상 제대로 살려면 피하지 말아야 할 싸움이기도 하다.

〈다우트〉는 영화가 끝난 뒤 아주 서늘한 뒤끝을 남기는 영화다. 하지만 끝나기 직전까지는 또 아주 뜨겁게 흥분시키는 영화이기도 하다. 좋은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고 풀기 어려운 숙제를 던져주는 영화다. 원래 풀기 어려운 숙제일수록 그걸 풀었을 때 느끼는 쾌감은 더 큰 법이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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