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한향란안산 원곡동 ‘국경 없는 거리’(위)에서 선입관을 버리고 골목 구석구석을 뒤져보면 재미있는 명소를 찾아낼 수 있다.
서울에서 지하철 4호선을 타고 한 시간 남짓 내려가면 경기 안산시 원곡동 ‘국경 없는 거리’를 만난다. 평일 오후 식당과 공장, 사무실에서 하루 노동을 끝내고 4호선 안산역 입구로 왈칵 쏟아져 나오는 50여 개국에서 온 외국인 2만여 명 사이에서 한국인은 이방인이 된다. 원곡동은 거리를 맴도는 냄새도 다르고 들리는 말소리도 낯설다. 이동통신사 대리점 스피커에서는 타이 대중가요가 흘러나오고, 주택가 창살에는 시래기 대신 중국식 소시지가 내걸려 겨울 건조한 바람을 맞고 있다.

ⓒ시사IN 한향란
국경 없는 거리, 원곡동은 서울 이태원이나 서래마을과 다르다. ‘외국인’보다는 ‘외국인 노동자’가 사는 동네가 원곡동이다. 가엾거나 미안한 마음이 들 때, 혹은 나라 정책상 필요할 때 한국인은 그곳을 찾는다. 하지만 원곡동에는 가난과 설움과 차별, 불법 체류자 단속과 노동 상담소, 설날 노래자랑만 있는 게 아니다. 50여 나라에서 넘어온 문화도 있다. 한국인은 그 ‘선물’을 함께 즐길 수 있다.  
 
가장 다양하고 이색적인 선물은 역시 음식이다. 원곡동 정육점에는 양갈비가 주렁주렁 내걸려 있다. ‘엄지양꼬치’(지도 ⑩)에서는 양 심줄·쇠심줄·쇠떡심부터 메추리·돼지싹뼈·건두부 같은 ‘신기한’ 재료들까지 꼬치에 끼워 굽는다. 좀더 용감한 식도락가에게는 ‘가마솥 통닭구이’(지도 ③)란 간판을 내건 작은 분식점을 추천한다. 중국 동포인 주인은 이곳에서 통닭구이 외에도 한 접시 가득 2000원에 ‘뚱저’라는 술안주를 판다. 돼지 껍질을 물에 삶아 묵처럼 굳혀 먹는 음식이다. 한입 베어 물면, 주인 부부는 한국인이 청국장 떠먹는 외국인 바라보듯 즐거운 표정으로 손님의 반응을 기다린다.

50여 나라 패션 유행도 ‘감상’할 만

익숙한 음식을 편하게 즐기고 싶다면 베트남 쌀국수집(Tre Xanh, 지도 ⑤)도 괜찮다. 대형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파는 쌀국수보다 값도 싸고 국물도 진하다. 한쪽 구석에 진열된 베트남 식료품과 담배·화장품·영화 DVD·가요 음반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외식보다 직접 요리해 먹기를 즐기는 원곡동 외국인들은 ‘월드푸드마트’(지도 ⑧) 같은 식료품 상점에서 저녁 찬거리를 준비한다. 중국식 절인 배추와 월병은 물론, ‘말라’ ‘사’ ‘다까이’로 불리는 동남아시아 채소·향신료도 쉽게 구할 수 있다.

먹을 것 말고도 원곡동에는 즐길 거리가 많다. 중국어·필리핀어·베트남어·인도네시아어·러시아어·스페인어·타이어 중 어느 하나라도 구사할 줄 안다면 ‘황실 노래방’(지도 ⑥) 등, 거리에 즐비한 노래방을 찾아 외국 노래를 연습할 수 있다. 길 건너 중국 정통 발 마사지(지도 ④) 숍에서는 지압봉으로 꼼꼼히 발바닥을 눌러준다.

원곡동은 세계 50여 개국의 패션 유행을 감지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인도네시아 이주민들은 ‘메이드 인 코리아’ 청바지보다 ‘메이드 인 인도네시아’인 레아(LEA) 청바지를 더 좋아한다. 인도네시아에서 청바지를 사와 원곡동에서 판매하는 ‘LEA 인도네시아’(지도 ⑦) 조용희 사장(56)에 따르면, 한 벌에 5만~6만원 하는 이 청바지는 인도네시아에서 ‘리바이스’ 못지않은 위상을 자랑한다. “허리와 허벅지가 얇고 엉덩이가 튀어나온 인도네시아인 체형에 딱 맞게 디자인한 이 청바지를 못 잊어 한국에서도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이 청바지만 찾는다.”

베트남인 섀기커트, 파키스탄인 구레나룻

ⓒ시사IN 한향란‘뚱저’라 불리는 돼지 껍질 묵.
미용실에 가면 더 다양한 세계 유행을 만난다. 예컨대 남자들만 해도, 각 나라마다 고집하는 헤어스타일이 다르다. 베트남 남자는 레이어드 섀기커트를, 중국과 스리랑카 남자는 바짝 깎아 올린 스포츠 커트를 좋아한다. 반면 인도네시아 남자는 매직 스트레이트나 컬러 염색을 즐긴다. ‘명코디 미용실’(지도 ⑨) 이수민 원장(38)은 “나라 이름에 ‘탄’자가 들어가는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 같은 곳 사람들은 구레나룻을 아주 정교하게 살리는 데 목숨을 걸더라”고 말했다.

외국 문화를 차분히 공부할 수 있는 곳도 생겼다. 지난해 10월 개관한 안산 다문화 작은 도서관(지도 ①)은 안산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위해 마련한 문화 공간이다. 인도네시아·베트남·중국·타이·필리핀 등 안산에 많이 거주하는 외국인의 고국에서 인기 있는 서적 4700여 권을 구비해놓았다.

ⓒ시사IN 한향란베트남 쌀국수(오른쪽)와 베트남식 닭볶음(왼쪽).
도서관에서 안산역 쪽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문화예술 공동체 공간인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지도 ②)가 자리 잡고 있다. 예술가 60여 명이 들락날락거리며 원곡동의 다문화 토양을 토대로 여러 창조 활동을 벌이는 곳이다. 네팔 사진작가를 불러 초청전을 열고 이주민이 직접 찍은 다큐 영상을 상영하는 평범한 행사는 물론 ‘쓰잘데기 없어 보이는’ 놀이판도 여러 차례 벌였다. 지난해에는 장기 두기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중국인과 조선족을 불러 장기 게임전을 열고 그 장면을 인터넷 방송 ‘아프리카’에 생중계했다. 옆에서는 미술 평론가가 현장 평론을 하는 등 한국인과 외국인이 왁자지껄 함께 섞여 놀았다.

원곡동이 마냥 즐겁기만 한 곳은 아니다. 거리에는 경찰서에서 내건 ‘불법 흉기 소지하지 말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국경 없는 거리’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PC방은 외국인용과 한국인용이 따로 있다. 한 비디오방 종업원은 “이 동네에 비디오방과 만화방이 많지만, 주인들이 웬만하면 외국인을 받지 않으려 한다. 시끄러운 데다 한국인 손님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아 오면 쫓아내는 편이다”라고 말했다. 원곡동에서 물건을 사거나 팔 때, 길을 물을 때, 대다수 한국인이 외국인에게 반말로 응대하는 것도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다. 이주민 사회 안에서도 힘센 나라 집단이 약한 나라 집단을 상대로 횡포를 부리기도 한다.

ⓒ시사IN 한향란베트남에서 인기 있는 화장품과 대중가요 CD.
하지만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 백기영 디렉터(40)는 원곡동을 보는 ‘한 가지 시선’을 경계한다. 약 2년 반 전 원곡동에서 이주민을 돕는 시민단체에서 일하던 백씨는 ‘이주노동자를 거지 취급하는 한국인의 시선’에 질려서 나왔다. “대부분 한국인은 ‘외국인이 이렇게 많아져 어떡하지’라는 위기론과 ‘불쌍하다’는 동정론 둘 중 하나에 갇혀 그들이 선사하는 다문화를 충분히 즐기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라고 백씨는 말했다. 선입견만으로 원곡동을 위험한 곳, 신기한 곳, 눈물 젖은 곳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 일단 가서 즐겨보자.

원곡동에서는 이국적인 채소를 구할 수 있다.
ⓒ시사IN 한향란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최신 유행 의류를 살펴보고 있다.


ⓒ리트머스 제공원곡동을 방문한 네팔 청소년들이 전통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기자명 안산·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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