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놈들을 살려두기는 쌀이 아깝다던 척 노리스도, 어느 시골 선량한 장승이라도 일단 눈만 마주치면 목을 꺾어놓았을 스티븐 시걸도 모두 떠나 강호가 쓸쓸하다. 홀로 남아 고군분투하는 건 잭 바우어(사진)뿐이다. ‘웨어 이즈 더 밤’이라는 문장에서 물음표와 느낌표가 채 삐져나오기도 전에 무릎에 총알 한 방 박아놓고 시작하는 잭 바우어의 박력은 2001년부터 7시즌이 막 시작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다.

〈24〉는 정치를 아는 드라마다. 더불어 이상의 가치와 현실의 비정함을 동시에 존중하는 드라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엄밀히 말해 잭 바우어와 대통령이다. 현명한 대통령과 꼭 그만큼 어리석은 대통령들이 그간의 시리즈를 관통해왔다. 정치 신념이나 가치관에 무관하게, 그들은 모두 거대한 테러에 직면했다. 7개 시즌은 일곱 번의 테러를 의미한다. 그 가운데 두 번은 미국 내에서 핵폭탄이 폭발하기도 했다. 대통령들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너나 할 것 없이 잭 바우어의 도움을 받았다. 잭 바우어는 매번 테러를 막아내고 테러리스트의 이마에 총알을 박아 넣었다.

그러나 한때 대테러기관 CTU의 국장 자리까지 올라갔던 잭 바우어는 지금 한낱 낭인의 처지다. 한마디로 잭 바우어의 인생은 산산조각이 났다. 아내는 죽었고 딸과는 의절했고 아버지와 형에게 배신당했으며, 심지어 그토록 애써 지켜낸 고국에서조차 버림받았다. 나라를 지키려다 정작 자기 자신은 지켜내지 못했다. 그래서 신분을 버리고 낭인 신세를 자처했다. 지금은 테러 진압 중 폭력 행위에 대한 청문회가 진행 중이다. 가장 흥미로운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시리즈 전체를 조망해보건대, 〈24〉는 국가주의 마초 가부장 영웅이 당위에 찌들어 주변과 자신을 지키지 못했던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고자 하는 일련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잭 바우어의 능력은 더 이상 애국 차원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관계들을 회복하기 위해 다시 한번 테러리스트를 진압하는 것이다. 오직 테러에 맞설 때에만 개인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게 인간 잭 바우어의 비극이다. 〈24〉를 보는 것도 즐겁지만 잭 바우어가 불쌍해 참을 수 없으니 이제 그만 종영하는 게 좋겠다고, 폭스TV 게시판에 남기고 왔다.

기자명 허지웅 (프리미어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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