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고등학생의 리얼리티 생활은 완벽하게 제거한 채 꽃미남 왕자님에게 선택된 서민 소녀의 신데렐라 이야기를 그린 〈꽃보다 남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도대체 드라마 〈꽃보다 남자〉(〈꽃남〉)가 왜 그리 인기인가? 뭐, 〈꽃남〉을 건강하고 바람직한 드라마라고 주장할 사람은 별로 없을 터이니 긴 서두는 필요 없을 듯하다. 〈꽃남〉이 〈에덴의 동쪽〉의 시청률을 누른 현상을 무엇이라 말해야 하는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신세대 막장 드라마’가, 구리구리한 ‘구세대 막장 드라마’를 누른 현상이라고 하면 적합하려나(‘막장 드라마’란 작품의 완성도나 일관성 같은 것은 차치한 채 오로지 자극적 요소로만 채워 시청률을 올리는, ‘갈 데까지 간’ 드라마를 말한다).

그러고 보면 요즘 텔레비전의 드라마 시청률 경쟁은 결국 막장 대 막장의 대결이다. 사건의 개연성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듯, 오로지 자극적인 요소를 반복해 배치해놓은 이야기들만 인기를 모은다. 지난해 말까지는 그럭저럭 기존 가족물의 외피를 쓰고서 막장 증상을 보이던 KBS 일일 드라마 〈너는 내 운명〉이나 MBC 창사기념 특별기획 〈에덴의 동쪽〉이 대세였다. 그런데 시청자들이 바라는 것이 그 ‘외피’가 아니라 ‘막장’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후에 나온 〈아내의 유혹〉과 〈꽃남〉은, 리얼리티니 윤리성 같은 군더더기 외피를 깨끗하게 제거하고 시청자의 욕망을 강하게 자극하는 방식으로만 속도감과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가는 ‘명품 막장’이다.

괜히 효자인 척, 어진 부모인 척하는 인물들은 제거하고 오로지 불륜과 억울함, 복수와 분노로만 빠르게 밀고 나가는 〈아내의 유혹〉과, 고등학생의 리얼리티 생활은 완벽하게 제거한 채 마치 마법의 램프 속 요정 같은 집사와 하녀들이 모든 것을 해다 바치는 것을 누리기만 하면 되는 꽃미남 왕자님에게 선택된 서민 소녀 잔디의 신데렐라 이야기로만 빠르게 밀고 나가는 〈꽃남〉은 의외로 무척 닮았다. 그러니 시대적 배경이니 선악·정의 등 여러 외피를 주렁주렁 달고 동어반복적이며 속도까지 느린 〈에덴의 동쪽〉이 〈꽃남〉과 〈아내의 유혹〉을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30, 40대 아줌마들이 〈꽃남〉에 ‘꽂힌’ 까닭

그러니 이렇게 비현실적이고 말도 안 되는 드라마를 왜 보느냐는 뻔한 질문은 하지 말자. 어차피 리얼리티에 대한 기대는 없다. 그런 것을 완벽히 제거했으니 오히려 속 편하다. 〈꽃남〉 속 세계는 평등이나 정의·공명정대·예의 같은 가치는 애초부터 깃들 여지가 없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짓밟고 괴롭히며,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비굴하게 무릎 꿇는 것이 당연한 세계다. 귀족 학교 신화고등학교에서는, 수면제 먹이고 납치·강제 추행 뒤 사진 찍어 공개하기, 달걀과 밀가루와 소화 분말을 뿌리는 폭행같이 당장 구속 가능한 범죄 행위가 전혀 범죄 의식 없이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학교 이사장의 아들이자 재벌 후계자인 구준표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퇴학당할 각오를 해야 하지만, 도대체 퇴학의 근거가 무엇인지는 되묻지 않는다. 심지어 구준표는 애인인 금잔디를 괴롭히는 남학생의 멱살을 잡고 “내일 당장 너네 회사 망하고 싶어?”라고 협박한다. 재벌 후계자는 자신을 언짢게 한 아이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그 부모가 경영하는 회사를 망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역시 전혀 비겁한 짓이라거나 사리에 어긋난다는 의식이 없다. 이 세계의 동력은 돈과 권력일 뿐, 법과 원칙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뉴시스불륜과 억울함, 복수와 분노로만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아내의 유혹〉.
법과 원칙, 정의와 평등같이 인간세계가 유지해야 하는 최소한의 명분이 완벽하게 제거된 이런 세계를 그래도 즐겁게 바라볼 수 있는 까닭은, 그 돈과 권력이 주는 너무나 환상적인 즐거움 덕이다. 수천만원짜리 옷을 마구 버리고, 수틀리면 아무나 해고하니 누구나 무릎 꿇고 쩔쩔매고, 자가용 비행기로 남태평양 섬으로 날아가면 아무도 없는 바닷가 모래사장에 바로 화려한 식탁이 펼쳐져 있는 이 꿈같은 상황을, 만화도 애니메이션도 아닌 실사 동영상으로 보는 재미가 짜릿한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는 유토피아이자 디스토피아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법·원칙·윤리 따위가 아니라, 돈과 권력의 힘에 따라 좌지우지된다. 돈과 권력에 밀려 무릎이 깨지고 소화 분말을 뒤집어쓰는 것보다 더 심한 고통과 굴욕을 당하면서도, 그까짓 돈 몇 푼과 불확실한 미래에 목숨을 걸고 살지 않는가. 그에 비하면 〈꽃남〉이 모욕의 대가로 제공하는 즐거움이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

이런 순정 만화 같은 이야기를 왜 30, 40대 아줌마들까지 보겠느냐고? 모르시는 말씀. 10년 전 외환 위기 때, 나름대로 리얼리티 있던 드라마 〈아줌마〉를 제치고, 소녀 취향의 〈가을동화〉를 드라마 시청률 1위로 올려놓은 것도 바로 이들이었다. 할머니들이 처녀·총각 결혼 이야기의 일일극을 즐기고, 중년 아저씨들이 여전히 청년들의 액션 영화를 즐기듯, 중장년 아줌마들도 순정 만화 같은 것을 여전히 즐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단 지금 주목할 만한 것은, 그래도 10년 전의 경제 위기 때에는 불치병 걸린 연인이라는 설정에서나 가능한 순정 100%의 사랑에 위안받고 싶어 했다면, 지금은 인간의 사랑 따위는 위안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돈과 권력으로 인한 굴욕과 분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희망 없는 복수에 이를 갈며, 자기도 권력자와 똑같이 돈과 사람을 폭력적으로 부려야 위로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정작 갈 데까지 간 것은 드라마뿐만 아니라 불황에다가 정치까지 답답한 지금 우리의 마음 상태다.

기자명 이영미 (대중문화 비평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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