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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먼저 차에 탔다. 돼지는 우리 안에서 물끄러미 사람들을 쳐다봤다. 질서정연하게 꼬챙이로 논바닥을 쑤시는 전경과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낯선 듯했다. 방제복을 입은 과학수사대가 사료가 쌓여 있는 창고로 들어갔다. 돼지는 먹이를 찾아 우리 안을 서성였다. 우리에는 먹이 대신 똥오줌이 가득했다. 

지난 1월29일 수원시 당수동 칠복산 자락에 자리 잡은 66㎢ 규모의 축사. 이곳에서 매일 아침 20여 마리 소와 돼지에게 사료를 주고 분비물을 치우던 사람은 ‘제2의 유영철’인 강호순씨(38)다. 매일 목장을 찾는 그를 이웃은 ‘성실한 청년’으로만 기억했다.

그가 스포츠 마사지 업소에 일자리를 구하러 갔을 때 일이다. 범행 얼마 전인 지난해 12월 초 그는 불쑥 업소를 찾아와 “나는 소를 키우고 있고 돈은 필요 없는 사람이다. 소일 삼아 일하고 싶다”라고 말을 꺼냈다. 12월29일 마사지사 한 명이 갑작스레 그만두자 사장은 강씨에게 연락했다. 강씨는 그날부터 이 스포츠 마사지 업소에서 일했다(이 업소는 안산에서도 인지도 높은 사우나에 입점해 있다). 군포보건소 인근 버스정류장에서 납치한 여대생을 스타킹으로 목졸라 살해하고 암매장한 지 꼭 열흘 뒤였다. 그 후 경찰에 붙잡힌 1월24일까지 강씨는 오전 10시 출근해 오후 10시 퇴근하는 생활을 어기지 않았다. 축사 인근 주민들은 이 기간에도 강씨가 매일 아침 가축에게 먹이를 주고 가는 모습을 봤다고 한다.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것은 연쇄살인범이 흔히 보이는 특징이다.

범죄심리학에서는 연쇄살인의 3대 특징으로 비슷한 피해자, 동일한 수법, 냉각기를 꼽는다. 강씨의 경우도 범죄 대상으로 삼은 사람은 전부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는 상태의 나약한 여성이었다. 피해자는 대부분 키 160cm 이하인 데다 작은 체구였던 것도 공통점이다.

강씨는 여성을 성폭행한 뒤 스타킹으로 목졸라 살해하고 암매장하는 동일한 범행 수법을 썼다. 단, 범죄를 거듭하며 수법은 갈수록 진화했다. 실종부터 피해자의 휴대전화가 꺼지기까지 걸린 시간이 범행을 거듭할수록 점점 단축됐다. 허경미 교수(계명대 경찰학부)는 “범죄가 모방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타인만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모방하고 발전시키는 것도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가장 최근 범죄인 군포 여대생 살인사건은 납치·살해·위장·은닉 등 그의 범죄 노하우를 전부 집결한 형태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여대생을 살해한 뒤 대담하게 군포의 농협 자동화 코너에 들어가 피해자의 카드로 현금 70만원을 인출했다. 범행 후 처음으로 자신을 노출한 것이다. CCTV에 잡힌 강씨는 가발을 뒤집어쓰고 손가락에는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 피임기구(콘돔)를 끼웠다. 인출기 앞에서 신용카드를 서너 차례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는 이상스러운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경찰조차 CCTV 화면을 근거로 수사 초기에는 “금융 거래에 익숙지 않은 사람”을 용의자로 추측했다. 이처럼 강씨가 현금인출기 앞에서 수상한 행동을 한 데 대해서는 ‘수사에 혼선을 빚기 위한 지능적 계략’이라는 추론과 범죄의 완벽성을 뽐내는 동시에 자신을 잡지 못하는 공권력을 조롱하려는 자기과시적 행동이라는 추론이 엇갈린다.

강씨, 이웃에 ‘성실한 청년’ 이미지 남겨

이번 사건에 범죄행동 전문가인 프로파일러로 참여한 권일용 경위(경찰청 과학수사센터 범죄행동 분석팀)는 “무동기 범죄(동기가 뚜렷하지 않은 범죄)의 경우 범죄자가 일련의 범죄 행위를 통해 스스로 심리적 성취감과 만족감을 고취하는 경향이 있다. 범행 횟수가 늘어날수록 검거되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법을 점차 발전해나가는 양상을 나타낸다”라고 분석한 바 있다.

그러나 연쇄살인의 3대 공통점 중 하나인 ‘냉각기를 갖는다’는 점은 강씨의 범행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허경미 교수는 “대체로 연쇄살인범은 한번 살인을 저지른 후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음 범행 대상을 물색하는 시간을 갖는다”라고 말했다. 강씨는 2006년 12월부터 2007년 1월 사이 5명을 살해했다. 안양의 노래방 도우미 김 아무개씨(당시 37세)를 살해한 다음 날 곧바로 대학생 연 아무개씨(당시 20세)를 상대로 같은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만으로 볼 때 군포 여대생을 살해하기 직전 범죄는 2007년 1월에 저질렀다. 냉각기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긴 22개월(1년 10개월)이라는 공백기가 생기는 셈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범죄심리과 강덕지 과장은 “공백기 이전 범죄는 연쇄살인이라 볼 수 있지만 이번 군포 여대생 살인사건은 별도의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묶어 설명하려면 ‘다중살인’ 정도가 적당하다”라고 말했다.

범행 동기에 대해서도 여전히 의문이 많다. 경찰에 따르면 강씨는 “장모 집에서 발생한 화재로 네 번째 부인이 사망하자 충격을 받고 자포자기 심정으로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1년여를 방황한 이후 여자들을 보면 살인 충동을 느꼈고, 그런 와중에 1차 범행을 한 다음부터는 자제할 수 없었다”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경찰은 부인이 죽기 직전 강씨가 보험에 가입, 보험금 4억8000만원을 타낸 점을 석연치 않게 생각해 ‘방화를 통한 살인’에 무게를 두고 수사 중이다. 그가 진술한 범행 동기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경찰은 “강씨가 연쇄살인에 대한 방어기제로 네 번째 부인 사망을 들먹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 역시 연쇄 살인범들의 공통점이다. 2007년 12월25일 실종된 이후 토막 살해당한 혜진·예슬양 사건에서 범인 정성현씨는 처음에는 범행 동기가 단순한 ‘교통사고’였다고 진술했다. 프로파일러 권일용 경위는 이같은 정씨의 주장을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실수’로 인한 것이라고 자신의 범죄를 합리화하면서 범행 동기에 대한 타인의 지탄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분석했다. 일반적으로 연쇄살인범은 피해자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기보다 자기 목적을 위해 살인을 정당화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강호순의 심리는 어떤 상태였을까? 일부 언론은 아직 심리 검사도 받지 않은 강씨를 ‘사이코패스(반사회적 인격장애자)’라 규정한다. 그러나 강씨를 사이코패스로 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국과수 강덕지 과장은 “일반적 범죄 범위에서 벗어났다고 사이코패스는 아니다. 이는 우리와 문화적 환경이 다른 미국식 개념이다”라고 말했다. 수사팀 나원오 계장은 “강씨에 대한 심리 검사는 아직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할 계획이 없다”라고 말했다. 경찰은 강씨의 심리 상태가 ‘정상’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나 계장은 “설사 강씨가 사이코패스라 하더라도 처벌을 받는 데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라고 덧붙였다.

기자명 박근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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