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
짧게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일본에서 졸저를 출간하는 관계로 며칠 동안 아주 많은 인터뷰를 했다. 일본 쪽 에디터가 해준 얘기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나온 한국 사회과학 책 중에서는 한홍구 선생의 책이 6000권으로, 이것보다는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고 한다.

문화가 어렵다고 하지만, 일본도 역시 어려워 보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제로 세대’라 불리는, 2000년 이후 등장한 일종의 신세대 예술가들이 일본에는 한 무더기 있고 한국에는 없다는 사실이 다를 것이다. 극우파 계열의 펑크록 그룹 여성 싱어에서 빈곤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좌파로 전향한 20대 르포 작가 아마미아 카린 같은 예술가의 등장은 인상적이다. 카린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3월에 개봉한다는데, 이 개막 행사에 참가하기로 약속하면서 한국에도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에 그 삶이 다큐멘터리가 될 정도인 문화인이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임권택, 안성기. 정말 좋은 영화인이지만, 너무 오래 해먹었다. 나야말로 한국의 새로운 20대 감독의 등장을 목마르게 기다리지만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도 부정하기 어렵다.

배용준 덕분에 먹고살게 된 문화기획자가 많아졌다는 얘기를 여러 번 들었다. 일본과 한국 관계도 그로 인해 새로운 기회가 생겨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경제학자로서 나는 한류 혹은 한류를 계기로 생겨난 일련의 변화가 한국 영화를 더욱 안 좋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한류로 인한 일련의 변화가 한국 영화에 나쁜 영향을 끼친 점이 적지 않다. 위는 배용준의 일본 방문 모습.

몇몇 ‘1000만 영화’에 집중된 영화 시장

경쟁 이론에서 사용하는 ‘진입장벽’이라는 용어로 말하자면, 영화의 규모가 커진 반면 그에 적합한 ‘조직’ 인프라는 생겨나지 않고, 무엇보다도 ‘실험’으로서 아방가르드가 서 있을 공간이 매우 협소해졌다는 점 등 그야말로 나빠진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수년간 한류에 기대면서 ‘돈 놓고 돈 먹기’ 하던 영화계의 끝은 매우 비극적일 것 같다. 아, 그렇다고 내가 엄청난 ‘아방가르드’를 기대하면서 상업적 영화를 일방적으로 거부하는가 하면, 꼭 그런 건 아니다.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3부작을 매우 중요한 사례로 보면서, 특히 이 제작팀의 계약 방식과 작동 방식 같은 것에 대해서 상당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일산에 한류 우드가 생기는 것을 보며 곧 한국 영화가 망하겠다고 직감한 때는 마침 〈반지의 제왕〉을 여러 면에서 분석해보던 무렵인데, 한국이 이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한의 왕국이나 도시 미나스트리스를 비롯한 〈반지의 제왕〉의 대단했던 세트들은 영화가 끝나자마자 완전 철거했다. 그리고 그 영화 제작팀은 흩어지지 않고, ‘돈 좀 벌어야겠다’라고 바로 〈킹콩〉 작업으로 들어갔다. 그렇다고 〈킹콩〉이 별 얘기가 없느냐? 잭 블랙 왕팬인 나는 〈킹콩〉의 매혹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자, 한국의 영화 얘기로 돌아와보자. 일부 제작사에 집중된 문화 권력에 관한 이야기나 멀티 상영관이 되면서 그야말로 ‘고를 것이 없다’는 편중된 영화 배급 시스템, 그리고 스크린 쿼터 축소에 대한 문제점에 관해서는 이미 사회적으로 충분히 얘기한 것 같다. 전체적으로 보면, ‘천만 영화’, 즉 1000만명의 국민이 보는 수준의 영화 몇 개에 집중되어 있는 현재의 영화 구조는 필연적으로 독점 시장이 지니는 권력화와 함께 비효율성이란 문제를 지니게 된다. 당연히 영화라는 매체가 다루는 이야기가 뻔한 것이 되고, 특정하게 얼굴이 알려진 스타 시스템은 더욱 강화된다. ‘스타가 뜨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문장 하나로 지난 4, 5년간의 한국 영화 시장을 설명하려는 시도였던 것으로 아는데, 이런 1990년대 할리우드 방식이 여전히 한국에서 유효할까?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과연 일부 영화계의 스타만 잘 먹고 잘 살면 한국 영화가 발전하고 또 영화라는, 한국 문화시장의 최정점에 서 있는 장르에 주어진 사회적 임무를 다하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 한국 영화의 위기는 밑에서부터 오고 있다. 영화감독이 ‘펀딩’에서부터 일괄 작업을 수행하는 정점에 있고, 누구나 언젠가는 감독이 되려고 한다. 그 속에서 튼튼하고도 유연한 영화 생태계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획일성·노동착취·‘이야깃거리 없음’ 같은 근본의 위기가 생겨나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 영화라는 것은 1990년대 등장한 할리우드 키즈와 외환 위기 이후 한동안 보였던 경제 부흥기의 ‘거품’이 결합되어 발생한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사회 문제에 등 돌린 채 침묵하는 영화인들

스태프와 진행 요원을 비롯한 영화계의 ‘나머지 사람’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위는 영화 〈왕의 남자〉 제작 현장.

영화인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돈이면 다냐?” 내가 직간접으로 경험한 한국의 고급 영화인들은 자신을 정당화할 때, “돈이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동료를 착취할 때에만 “영화는 예술혼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자신은 큰돈을 벌면서, 착취할 때에만 예술가 정신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마음을 지우기 어렵다.

감독만 남고 나머지는 전부 비정규직으로 바뀌는 그 구조에서, 프로젝트별이 아닌 기관별 조직 구성에 관한 문제는 스태프와 진행 요원들을 비롯한 영화계의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배려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일본의 아사히신문이나 NHK가 ‘파견직’과 같은 비정규직 문제를 끊임없이 다루는데, 정작 그들 내에서도 심각한 비정규직 문제가 잔존한다는 딜레마가 있다. 한국 영화도 마찬가지인데, 이를 단순히 몇 년 동안 ‘착취’라는 방식으로 해결한 것 같다. 영화를 문화인들이 활동하는 경제 영역인 ‘문화생태계’로 보려는 시각이 생기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조금 더 가까워질 것 같다.

두 번째 질문은 조금 더 직접적인 것이다. 과연 한국의 영화인들은 ‘사회적 책임’이라는 범주에 대해서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해보고 싶다. 멀리는 미국 영화 직배 문제에서부터 가깝게는 스크린쿼터 문제에 이르기까지, 나도 영화인들이 내걸었던 몇 가지 의제에 대해서는 지지도, 동조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크게 보면 영화라는 매체, 그리고 작게 보면 ‘영화인들’이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과연 적절한 구실을 하는지 의문이다. 류승완 감독의 〈짝패〉를 아주 인상적으로 본 기억이 나고,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이준익 감독의 〈즐거운 인생〉을 보면서 행복했다. 그러나 한국의 영화가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의 문제를 과연 다루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대체로 좀 부정적이다. 흔히 영화인들이 자본주의의 왕국이며, 세계 제국의 문화적 심장이라며 할리우드를 주적으로 놓고 말하긴 하는데, 할리우드 영화마저 한국 영화처럼 비사회적 혹은 탈사회적이지 않다. 무엇보다 할리우드 영화인들은 지금 한국 영화인들처럼 사회 문제에 완전히 등 돌린 채로 자기만의 성채에서 침묵하지는 않는다.

조금 넓게 영화인의 사회적 역할을 보자. 중·고등학교에 영화 동아리를 만들고, 여기에 감독이나 영화인이 가끔씩 가서 멘토 역할을 하고, 지역의 영화 토론회 같은 데에도 폭넓게 참여하면 안 되나? 그 정도는 소일거리로 조금씩 해볼 수 있는 봉사 아닌가? 한국은 지금 ‘돈독’이 올라 사회적으로 영화의 파토스(Pathos)가 죽어간다. 사교육에 지친 한국의 10대와 대화하고, 그들에게 예술적 영혼을 불어넣어주는 일은, 사회과학자는 못하고 강호동이나 유재석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인이 할 수 있는 사회적 기여는 바로 10대에게 영화 파토스를 만들어주는 것과 같은 일이다. 류승완·봉준호·박찬욱, 이런 사람들이 한국의 10대에게 눈을 좀 돌려주면 대단히 고맙겠다.

기자명 우석훈 (경제학 박사·〈88만원 세대〉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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