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편집하다 보면 종종 빠지는 고민 가운데 하나는 이런 거다. 독자에 대한 배려는 어디까지가 적정한가. 편집자는 어느 선까지 개입해야 하는가. 이와 관련해 들은 일화가 떠오른다. 한 출판사 대표가, ‘반상의 철녀’ 루이 9단의 자서전을 만들 때 일이다. 전문적인 바둑 용어가 도처에 난무하니만큼, ‘편집자 주’를 붙이긴 해야 할 것 같은데, 도대체 어느 선까지가 적정한지를 모르겠는 거다. 용어 문제만 해결되면 바둑을 모르는 독자도 흥미롭게 읽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장고 끝에 처음부터 끝까지 편집자 주를 붙이기로 결정했다. 일상에서 쓰는 말까지 전부. ‘패착-패배의 결정적 요인이 된 한 수’, ‘말-공격과 방어를 행하는 바둑돌’ 하는 식으로 말이다. 결과는 참담했다. 무엇보다 이 책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일 법한 타깃 독자들이 외면했다. 사사건건 붙은 편집자 주를 읽다가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게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어 불쾌했다고 토로하는 독자도 있었다.
나는 〈돌지매〉의, 내레이션을 집필하는 작가를 따로 둔다는 시도(‘결정적 장면’이라는 코너로 한때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한동원씨가 그 주인공이다)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뭐든 좋으니 내키는 대로 맘껏 해봐” 하는 대범한 내레이션을 듣다가 감탄하기까지 했다. 거기엔 일반적인 사극이나 텔레비전 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가슴 설레는 요소가 있었다. 다만 제아무리 재기발랄하더라도 해설자의 과도한 개입은 역시 곤란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렇게 얘기하는 나도 얼마 전 미스터리 소설을 편집하면서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는 판단에 편집자 주를 잔뜩 붙였다가 ‘의욕과 과욕 사이에서 헤매고 있다’는 독자들의 불평을 듣고 말았다. 아마 그 책을 다시 만든다 하더라도 나의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 독자(혹은 시청자)에 대한 배려, 의욕과 과욕의 언저리에서 미묘한 균형을 잡는 일은 그토록 어려운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