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렇듯이 동시다발 테러의 주인공은 뭄바이에서도 괴력을 선보였다. 그들은 파키스탄 항구에서 화물선을 납치해 밀입국했다는데, 인도 해군은 조사 결과 그 배가 테러에 이용된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 말했다. 설령 테러범들이 눈에 띄지 않고 바닷가 호텔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고 치자. 그러나 호텔 내부는 국제 비즈니스 거물이 드나들고 서방의 비밀정보부 요원의 아지트가 있다고 알려진 철벽 감시 구역이다. 사건 당일만 해도 유럽연합 의원들의 회합이 열리던 호텔의 감시망을 테러범들은 투명인간으로 변신해 통과한 듯 보인다.
검시관에 따르면 호텔에서 희생당한 인질의 시체 대부분에 잔인하게 고문을 받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테러범들이 그 넓은 호텔에 층층이 불을 지르고 진압작전을 생중계하는 텔레비전 화면을 분석해가며 60시간이 넘도록 군·경과 총격전을 벌인 것도 모자라 인질을 고문하기까지 했다니, 모두 각기 다른 장소 10곳에 흩어져 있었다는 테러범 10명 가운데 과연 몇 명이 호텔에 투입되었던 것인지를 다시 계산해볼 필요가 있다.
사망한 테러범 중에는 얼굴이 뭉개지거나 총알이 두 눈을 관통한 경우도 있다. 테러범에게 그렇게 가깝게 접근한 진압 부대가 없고 두 눈에 총을 쏘아 자살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사건 현장에는 제3의 집단이 존재했다’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누군가가 테러범 구실을 떠맡다가 제3의 집단에 의해 희생됐고, 제3의 집단은 유유히 호텔을 빠져나갔다는 시나리오다. 이런 추론을 뒷받침하는 정황이 또 있다.
테러 진압 부대장 암살 미스터리
지난해 9월15일 인도의 데칸 헤럴드는 그때까지 몇 달 동안 벌어진 연속 테러의 주체임을 자처하던 ‘인디아 무자헤딘’이 “적당한 시기에 카르카레를 뭄바이에서 제거할 것”이라는 전자편지를 몇몇 언론사에 보냈다고 보도했다. 이유인즉 “카르카레가 이슬람 교도들을 학대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사실을 말하자면 그 무렵 테러의 배후 관련자로 끈질긴 추적을 받던 자는 인도 군부의 실력자 ‘스리칸트 프라사드 푸로히트’ 육군 대령과 관련이 있다. “심 카드(휴대전화 사용자의 개인 정보를 저장하는 플라스틱 카드)를 빨리 바꿔. (체포된) 시브나라인이 몽땅 불었어.” 카르카레는 푸로히트가 어느 퇴역 장군에게 보낸 이 SMS를 입수한 끝에 뭄바이 사건 직전, 그를 체포했다.
인도에서 현역 군인 집단이 테러 관련 혐의로 기소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예정대로 재판이 진행되었다면 그동안 숨겨진 테러의 전모가 만천하에 드러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중 흑막에 가려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2006년 7월11일 뭄바이 테러다. 그날 저녁 퇴근 시간 열차에서 불과 11분 사이에 일곱 차례의 폭파 사건이 일어나 207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191명이 희생된 2004년 3월11일 마드리드 테러를 앞질러 9·11 이후 최대 규모의 테러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번 뭄바이 2차 테러에 휩쓸려 푸로히트 재판은 실종되었고 카르카레의 죽음으로 테러의 비밀도 땅에 묻혔다. 미국에서 테러 수사의 일인자 존 오닐(전 연방수사국 부국장)이 9월11일 세계무역센터 보안책임자로 처음 출근한 날 잿더미에 묻혀 사라진 비극의 복사판이다.
델리 주재 외교관 샤 자만 칸(전 파키스탄 공보부 장관)은 2008년의 마지막 날, 인도 언론인과 인터뷰한 자리에서 “파키스탄과 인도를 혼란에 빠뜨리고 분할 통치하려는 제3 세력의 국제 음모에 불행하게도 누군가가 동조하고 있다. 그들의 촉수를 까발리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라고 단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