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징용 피폭자들이 미쓰비시 정공을 상대로 피해 보상 소송을 낸 뒤 부산지방법원 앞에 섰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히로시마에 있는 군수공장 미쓰비시 정공에 끌려가 강제 노역에 종사하다 원자폭탄에 피폭당한 평택 지역 징용자들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쐐기를 박았다. 새해 벽두, 일본 정부가 1951년에 공포한 ‘총리부령 24호’와 ‘대장성령 4호’를 인용해 독도를 자국 영토에서 배제했다는 내용이 각 언론에 대서특필된 데는 이들의 눈물겨운 투쟁 사연이 숨어 있었다.

일본은 1951년 이 두 개 법령에서 독도를 자국의 부속도서에서 제외한다고 공표했다. 특히 총리부령 24호는 일본이 옛 조선총독부 소유의 재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과거 식민지였던 섬’과 ‘현재 일본의 섬’을 구분한 내용을 담았는데 제2조에 ‘울릉도·제주도·독도는 일본의 섬이 아니다’라고 명기돼 있다. 이 문서 입수는 갈수록 노골화하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쐐기를 박을 쾌거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이 문서는 우연히 입수된 것이 아니다. 배경에는 정부의 냉대와 국민의 무관심 속에 8년여에 걸쳐 미쓰비시 정공을 상대로 외로운 법정 싸움을 벌여온 강제징용자들이 있다.

국내 강제징용 원폭 피해자들이 미쓰비시 정공을 상대로 부산지방법원에 체불 임금과 피폭자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낸 때는 2001년 5월이었다. 피고 미쓰비시 정공 측은 재판부에  “1965년 한·일 협정으로 보상은 끝났다”라는 답변서를 제출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피해자들은 다시 서울지방법원에 한국 외교통상부를 상대로 한·일 협정 관련 정보 공개를 청구했다. 2003년 법원은 이들의 손을 들어줬고, 2005년 정부는 한·일 협정 문서를 공개했다. 그러나 문서에는 일본이 이들 피해자에게 보상금을 지불했다는 내용은 들어 있지 않았다.

“한·일 양심 세력이 힘 합친 결과”

이들의 각종 소송을 주도적으로 대리해온 최봉태 변호사는 “결국 보상이 끝났다고 주장하는 일본 정부에 한국 측 문서 내용이 맞는지 확인하는 절차가 불가피했다. 일본 내 양심적인 시민 단체들과 힘을 합쳐 ‘한일회담 문서 공개를 구하는 회’를 만들고, 2006년 말 일본 외무성을 상대로 문서 공개 청구 소송에 들어갔다”라고 말했다. 이 과정에는 언어가 통하지 않는 한·일 양국 관계자들을 위해 자원봉사자로 나서준 재일동포 3세 김양수씨의 도움이 큰 힘이 됐다.

1년 7개월여 동안 일본 법정에서 지난한 투쟁을 벌인 끝에 일본 재판부는 이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외무성은 지난해 7월 6만여 쪽에 이르는 한일회담 관련 문서를 내놓았다. 하지만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서류의 25%는 판독이 불가능하도록 먹칠한 상태였다. 서류 내용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한·일 관계 전문 감식 기관의 도움이 절실했다. 최봉태 변호사는 한·일 양국의 문서를 독도 관련 전문 부서가 있는 한국해양개발원에 비교 판독을 의뢰했다. 그 결과 일본 정부가 고의로 은폐하려고 먹칠한 독도 관련 내용이 가까스로 빛을 본 것이다. 이 내용은 지난 연말 청와대에도 보고됐다.

하지만 정작 독도를 지킬 귀중한 문서를 이끌어낸 징용 피해자들의 처지는 막막하다. 8년여를 끌어온 이들의 소송은 오는 2월3일 부산고등법원의 항소심 판결을 앞두고 있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