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안희태

올신춘문예는 불안한 20대를 그린 작품의 전시장이다. 도시의 잉여인간, 실패하는 청년, 청년 노숙자…. 마치 주제어를 정해준 듯 청년 실업을 소재로 한 작품이 차고 넘쳤다.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진보경의 〈호모 리터니즈〉에서 주인공 ‘나’는 취직에 실패한 뒤 남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취업 준비생이다. 모범생으로 노력했지만 세상은 나를 원치 않는다. 실업으로 인해 의도와 상관없이 유예된 삶을 살게 되었다. 출발점이 어디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법이다. 지금 아무 곳에나 들어가면 평생 그 좁은 바닥에서 푸드덕거리다 끝날 거라고 말한다.

‘청년 실업’이라는 우울한 유령이 한국 사회 주변을 맴돌고 있다. 실업(失業·unemploy ment)은 분명 직업을 잃은 일시적이고 비정상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다. 그런데 이제는 이 사회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치료 불가능한 단계에 접어들었다. 청년 실업자를 ‘사회적 홈리스’라 분석하는 전문가도 있다. 폴란드 출신의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저서 〈쓰레기가 되는 삶들〉에서 “현대를 사는 인간은 쓰레기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다”라고 규정한다. 실업자들은 현대화가 낳은 일시적인 부산물이 아니라 경제 진보 과정에서 초래되는 불가피한 산물이라는 것이다. 기술적 진보는 이 세상에서 훨씬 더 적은 사람을 원한다. 이 현상은 갈수록 더 심해질 것이다.

A+ 학점을 F로 바꿔달라고 ‘애걸’

대학은 학문 탐구가 아니라 취업을 탐구하는 곳으로 바뀐 지 오래다. 또 4년제를 넘어선 것도 이미 오래전이다. 요즈음 대학생에게는 대학 5학년은 필수, 대학 6학년은 선택이라 한다. 대학원은 교양이다. 4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이 오히려 특별한 경우가 되었다.

성균관대 김 아무개씨(여·24)는 오는 2월 졸업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학교를 계속 다니기 위해 김씨는 교수를 찾아가 F학점을 달라고 청했다. 그 과목의 성적은 A+였다. 김씨는 이번 학기를 휴학하고 2학기 때 학교를 마칠 생각이다. 기업 공채가 몰려 있는 하반기에 대학생 신분으로 취업을 노려보려 한다. 중앙대 송 아무개씨(여·25)도 9학기를 다닐 계획이다. 송씨는 “5학년 1학기는 인턴과 연수를 한 후 2학기에 취업하고 싶다. 실패하면 대학원에 진학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졸업 학점을 다 채운 서울의 한 사립대 경제학과 김 아무개씨(27)도 졸업하지 않기 위해 교수에게 사정해 전공 수업에서 F학점을 받았다. 1년 동안 대학생 신분을 유지하려면 김씨가 투자해야 할 돈은 1000만원가량이다(17쪽 표 참조). 하지만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느끼는 안도감을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김씨는 “대학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고, 무엇보다 응시할 수 있는 회사가 많다는 점 때문에 대학 5학년은 필수 과정이 되어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김씨는 대학 5학년이 실업을 잠시 유예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대학원 진학도 마찬가지다(18쪽 상자 기사 참조).

내수와 수출이 유례없이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공장은 가동 시간을 줄이거나 아예 출입문을 닫는다. 사람을 뽑는 회사보다 내보내는 회사가 더 많다. 일자리 창출은커녕 유지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대부분의 청년이 실업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20대가 대학가를 맴돌며 사회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
 

ⓒ뉴시스요즘 대학 5학년은 필수, 대학 6학년은 선택이다. 위는 취업 게시판 앞의 젊은이.

구직자도 관심 없는 정부의 실업대책

정부가 일자리 만들기에 팔을 걷어붙인 것은 당연했다. 청년 실업은 경제성장·사회불안과 직결되는 사안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새해 경제 운영에서 일자리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의 해법은 청년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다. 1월 첫 국무회의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녹색 뉴딜 정책’에서 정부는 일자리 96만 개를 만들겠다고 호언했다. 하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대책이었다. 올해 3131억원을 투입해 2만2498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것이라고 밝힌 산림청의 녹색 숲 가꾸기 사업. 하지만 대학을 졸업한 구직자가 산에 올라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산림청의 한 관계자는 “양적으로 자릿수에만 연연하다 보니 질적으로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노력이 부족했다. 대학생이 할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부는 공공기관 행정인턴제도와 글로벌 청년리더 10만명 육성 정책이 대학생 구직자에게는 맞춤 제도라고 자신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강조한다. 신년 국정 연설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청년 일자리가 크게 부족한 상황이니 정부가 앞장서 청년이 일할 기회를 만들어보자고 했다. 모든 부처가 함께 노력해서 우선 청년 인턴 자리 7만 개를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행정인턴제를 운용할 정부 기관과 단체는 뚜렷한 계획이 없다. 활용 계획이 구체적이지 않아 제도의 실효성도 의문이다. 결국 행정인턴제는 고용 기간과 보수가 좀더 늘어난 ‘관공서 아르바이트’가 될 가능성이 높다.

2009년 행정 인턴 422명을 채용할 예정인 국세청의 한 고위 관계자는 “위에서 뽑으라고 해서 뽑기는 했는데 무슨 일을 시킬지는 더 고민해봐야 한다. 조사 업무를 시킬 수도 없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보건복지가족부의 한 관계자는 “일단 복사 같은 단순 업무는 시키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전문적인 일을 시킬 수도 없어 난감하다”라고 말했다. 행정자치부 한 관계자는 “관공서 아르바이트를 좀더 개선해 운용할 생각이다. 고급 인력에게 단순 업무만 하게 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큰 낭비다”라고 말했다. 구청에서 아르바이트 대학생 관리 일을 하던 한 주임은 “행정 인턴의 의미를 찾아보자면, 공직 사 회 분위기를 경험하게 하는 것인데 그 일이 다른 일에 비해 낫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시사IN 백승기1월6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교육과학기술부 행정 인턴 지원자가 면접을 보고 있다

행정인턴제는 관공서 아르바이트?

공주대학을 졸업한 장 아무개씨(24)는 관공서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본 경험이 있다. 공영주차장에 들어오는 차의 번호를 적거나 차가 밀리면 주차 안내를 하는 게 장씨의 일이었다. 하루 4~5시간 일하고 한 달에 60만원을 받았다. 사범대학을 나와 교사가 된 장씨는 “관공서 아르바이트 경험이 경력에 보탬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동우전문대를 졸업한 김 아무개씨(24)에 비해 장씨는 그나마 보람 있는 일을 한 경우다. 농업기술센터에서 일한 김씨는 직원과 따로 떨어져 시간을 ‘그야말로’ 때워야 했다. 기술센터 직원은 아르바이트생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몰라 마냥 출퇴근만 하게 했다. 책 읽는 게 관공서 아르바이트의 주요 일과였다. 그렇게 하루 7~8시간을 때우면 월급이 60만원 정도 나왔다.

주 5일제, 5~8시간 근무, 월 60만원 보장. 대우가 괜찮고 일은 편하니 사람이 몰렸다. 100 대 1은 기본이다. 올 2월 명지대학을 졸업한 최 아무개씨(28)는 구청에서 복사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100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했다. 제약회사 취업을 준비하는 최씨에게 이 경험은 용돈벌이 수단 이상은 아니었다.

행정 인턴 지원자조차 그 이상 기대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행정안전부 인턴에 응모한 연세대 졸업생 김 아무개씨(26)는 “인턴으로 배우겠다는 생각은 없다. 실업자임을 숨기고 이력서에 한 줄 더하기 위해 원서를 넣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경기도·강원도 교육청이 정부 지침에 따라 정원의 2%를 행정 인턴으로 모집했으나 정원 미달됐다.

 

 

 

 

 

ⓒ시사IN 한향란취업 준비에는 밤낮이 없다. 위는 학교 고시반에서 공부하는 취업 준비생.

 

1월6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있었던 교육과학기술부 행정인턴 면접장에서 만난 박 아무개씨(26)는 임용고시를 준비 중이었고, 이름 밝히기를 꺼린 면접자 두 명은 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행정 인턴 기간이 끝나면 다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행정 인턴 지원자는 공무원 시험 등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사람이 대다수다. 행정 인턴 채용 공고에는 ‘선발되더라도 추후 정규 공무원으로 임용하거나 임용시험 시 가산점 등의 혜택은 없습니다’라는 유의사항이 첨부되어 있다. 공무원 시험의 경우 시험 점수가 당락을 가른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처지에서 인턴 경험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결국 2009년 실업자 통계에서 사라질지 모를 10만여 명이 2010년에 그대로 다시 등장할 수도 있다.

정작 글로벌 리더 양성 계획은 없어

이명박 대통령은 신년 연설에서 ‘글로벌 리더 10만명 양성 계획’을 강조했다. 3월부터 실시되는 미국 대학생 연수취업 프로그램(WEST), 워킹홀리데이 인원의 확대, 해외 인턴십 확대 등이 그 골자다.

 

하지만 대학생 구직자들은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해외 인턴 제도나 워킹홀리데이 경험이 ‘글로벌 리더’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해외에 ‘나가는 것’ 이외에 어디에도 정부의 글로벌 리더 양성 계획은 담겨 있지 않다.

고려대 경영학과 김 아무개씨(26)는 지난해 7월 중국 상하이에 있는 컨설팅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학교 수업과 연계된 해외 인턴 프로그램이었다. 그의 업무는 간단한 서류 정리 정도였다. 중국어를 쓸 기회는 거의 없었다. 서강대 노 아무개씨(25)는 2005년 오스트레일리아를 워킹홀리데이로 다녀왔다. 프로그램은 농장에서 망고·딸기·사과를 따는 일이었다. 농장에서 쓰는 영어는 날씨와 농업 관련 회화로 한정돼 있었다. 노씨는 한국에 돌아와서 1년 공백을 메우기 위해 더 노력해야 했다. 현재는 취업을 위해 토익을 공부한다.
 

취업을 할 수 있어 해외로 나가는 가장 쉽고 저렴한 통로로 알려진 워킹홀리데이의 경우,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제한적이다. 열매 따기, 식당 서빙, 하우스 키핑, 타일 깔기 따위 단순노동이 대부분이다. 운이 좋거나 회화 능력이 출중한 소수 지원자가 호텔과 사무실 등지에서 보조로 일할 수 있다.

다른 경우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정부가 세계 최초로 체결했다고 공언하는 미국 WEST. 하지만 미국 경기가 최악의 상황인 현시점에서 영어와 일을 함께 배울 수 있는 내실 있는 유급 인턴 자리를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올 3월부터 추진하기로 한 WEST 모집 공고는 계속 늦어지고 있다. 신청을 위해서는 학교의 추천서를 받아 주한 미국 대사관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 서강대 종합봉사실의 한 관계자는 “WEST에 대해 학교 당국은 잘 모르고, 실제로 문의하는 학생도 적다”라고 말했다. 연세대 취업 관련 관계자도 “프로그램이 명확하지 않다. 참가비와 생활비를 합하면 3000만원 넘게 들어 경제적 부담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제4차 라디오 연설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진정한 청년 정신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담대한 도전정신이며, 지금이야말로 청년 여러분이 청년 정신을 발휘해야 할 때다”라고 말했다. 정부는 시간 때우기 인턴 제도와 산과 강에 삽질하는 일자리만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고는 청년에게 직업에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고, 자리가 나면 너무 많은 것을 묻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라고만 한다. 2009년 대한민국 청년들이 가슴에 성적표·자격증·인턴 경력표·봉사활동 카드·헌혈 증서를 치렁치렁 달고도 대학이란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몸부림친다. 슬픈 일이다.

 

취재 지원 : 유슬기·이환희·이해나 인턴 기자

기자명 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ac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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