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의 앞날은 그야말로 ‘안 봐도 비디오’다. 카세트테이프가 먼저 간 그 길을 바쁘게 따라가기 때문이다. 이제 웬만한 동네에서는 비디오 대여점 찾기도 고달픈 일이 되어버렸다. 온 가족의 신주단지가 겨우 10여 년 만에 ‘줘도 안 갖는’ 애물로 전락하고 만 거다.

‘실수로 대여점 내 모든 비디오테이프를 지워버린 점원이 주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순 엉터리 가짜 영화 만들어 채워넣는 이야기’. 미셸 공드리 감독이 주연배우 잭 블랙을 처음 만나 대강 이런 줄거리를 들려주었을 때 배우가 던진 첫 마디도 이랬다. “요새도 미국에 비디오 가게가 있나요?” 관객 역시 같은 의문 품고 보기 시작하는 영화. 100분 후에는 처음의 그 의문을 간절한 주문으로 바꿔 품고야 만다. “요새도 이런 비디오 가게가 있었으면 참 좋겠다”라고.

대형 DVD 대여 체인점에 밀려 폐업 위기에 처한 동네 비디오 대여점 ‘비카인드 리와인드’. 싼 맛에 찾는 빈민가 손님과 ‘그놈의 정 때문에’ 발길 끊지 못한 단골손님 덕에 근근이 먹고살았지만 이제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설상가상. 재개발 압력 막아낼 비책을 찾겠다며 주인이 며칠 자리 비운 사이, 점원 마이크(모스 데프)의 덜 떨어진 친구 제리(잭 블랙)가 대형 사고를 친다. 감전 사고를 당해서 자석인간이 된 줄도 모르고 가게 안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통에 모든 비디오테이프가 지워진 것. 마이크와 제리의 뇌 구조에서 나온 해결책이라는 게 고작 홈비디오 카메라 들고 순 ‘야메’ 영화 찍어 채워넣는 건데, 뜻밖에도 이 엉터리 영화 보고 좋~단다. 소문을 듣고 몰려든 고객들의 문의 폭주! 그때부터 관객이 원하는 영화를 자기 식대로 리메이크해 빌려주는 맞춤형 주문생산 영화 대여사업으로 얘들, 돈 좀 만진다. 

〈비카인드 리와인드〉는 코미디 영화다. 〈고스트 버스터즈〉에서 〈맨 인 블랙〉까지. 줄잡아 20편이 넘는 영화를 마구잡이로 리메이크하는 ‘야메’ 촬영 과정 보며 웃음을 참기란, 물속에서 숨을 참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잭 블랙의 연기는 물론이려니와, 〈이터널 선샤인〉 〈수면의 과학〉 같은 전작에서 선보인 바 있는 미셸 공드리 감독의 공들인 수작업 특수효과 역시 참기 힘든 웃음의 ‘주범’이다. 자동차 범퍼로 로보캅 옷을 해 입히고, 헤어 드라이어로 악당을 쏘아 맞추고, 욕조를 개조해 자동차를 만드는 따위 기발한 수법은, CG가 난무하는 시대에 창의적 핸드메이드 특수효과의 즐거움을 보여준다.

‘핸드메이드’ 특수효과가 주는 즐거움

하지만 이처럼 웃음을 참기 힘든 코미디 영화가 감동 휴먼 드라마로 마무리될 줄 미처 몰랐다. 철거 직전 비디오 대여점에 모인 마을 사람들이 ‘21세기 〈시네마 천국〉’이라 불러도 좋을 풍경을 연출하는 대목에 이르면, 〈시사IN〉 독자는 지난 호 ‘대형 마트 끊고 살아보기’ 기사에 인용된 조한혜정 교수의 주장을 떠올릴지 모른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위험 사회의 대안으로 ‘마을’의 공동체 의식과 ‘단골’의 연대감을 내세운 그 주장의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가 바로 〈비카인드 리와인드〉의 훈훈한 라스트신이기 때문이다.

고인이 된 고정희 시인이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라고 쓴 시를 읽은 게 15년 전이다. 사라진 것들의 여백이 유난히 커 보이는 요즘이다. “전광석화같이, 질풍노도처럼” 밀어붙이는 가치 파괴의 속도전에 현기증을 느끼는 분들께 이 영화를 권한다. 사라진 것들의 쓸쓸한 여백을 채우는 온갖 사나운 것의 천박한 ‘삽질’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감동을 줄 수 없는 법이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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