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가족에게서 독립하며 ‘내 삶이 가족으로부터 선명하게 분리될 수 있을까’ 회의적 질문을 할 때가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수건과 그릇 때문이었다. 엄마는 뭐 하러 새것을 사냐며 ‘○○○ 여사 회갑 기념’ 따위 글자가 박힌 수건을 내놓았다. 그리고 “너 시집갈 때 주려고” 차곡차곡 모은 그릇도 꺼냈다. 그것들을 받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엄마는 진심으로 서운해했다. 아빠는 내가 독립하는 것 자체를 못마땅해했다. 한 개인이 가족 구성원에서 단독자로 살게 되는 일이란 단박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닌, 점진적으로 이뤄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성취에 가깝다.

tvN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이하 ‘검블유’)는 IT 업계를 배경으로 욕망하고 성취하는 여성,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여성, 일도 사랑도 잘하는 여성, 이성과의 연애에만 포섭될 수 없는 여성 등 그동안 대중문화가 납작하게 재현해온 여성들을 입체적으로 보여주었다. 이 드라마가 이룬 성취 중 하나는 여성을 절절한 가족 서사의 일부로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배타미(임수정)와 차현(이다희)의 능력과 욕망에는 특별한 계기가 없었다. “부모님 원수를 갚거나 전남편한테 복수”하려는 수단도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정켈 그림

낡은 세계 지르밟고 미래로 달려가는 여성들

드라마의 한 축이 그런 개인을 발견한 것이었다면 한편에서는 송가경(전혜진)으로 표상된 ‘딸의 전쟁’이 맞물려 굴러갔다. 송가경은 몰락한 원가족을 살리기 위해 ‘시댁의 개’로 살다가 마침내 가족과 결혼 제도 밖으로 탈출한다. 자신을 조종하는 시어머니에게 저항하며 이혼을 선언한 자신을 향해 당장 무릎 꿇기를 명령하는 아버지에게 송가경은 말한다. “아버지, 망하세요.” 딸을 착취하며 겨우 숨통만 유지해온 ‘아버지 세계’는 존재할 가치도 없고, 이미 망했다는 선언이다.

이런 서사는 MBC 드라마 〈봄밤〉에도 나온다. 〈봄밤〉은 전형적인 로맨스 장르를 표방했지만, 한편으로는 딸들이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어떻게 분투하는지를 그린 드라마이기도 하다. 부모의 뜻에 따라 결혼했지만 가정 폭력과 부부 강간에 시달리다 이혼하는 장녀 이서인(임성언), 자신의 노후를 위해 이사장 아들과 결혼하기를 강요하는 아버지에 맞서 본인이 선택한 사랑을 지키는 둘째 이정인(한지민), 이제껏 자녀를 불행하게 만든 가정을 지켜온 것을 후회하며 딸들의 지지자가 되는 어머니의 서사가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재현되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사이다’가 아니고 충분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봄밤〉이 재현한 여성 서사는 치열했다.

독립한 나의 공간에 부모의 미련이 공존하듯, 우리가 사는 세상 또한 아버지 세계의 관습과 거기서 벗어나려는 이들이 공존하고, 대결하고, 타협하고, 절연하고, 탈출하며 서사를 쌓아간다. 많은 여성의 지향은 욕망의 계기 따위 필요 없는 단독자, 배타미와 차현에 다다르겠지만, 현실은 그리 간단치 않다. 〈검블유〉가 여성의 지향이자 미래라면, 〈봄밤〉은 현실이자 현재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미 아버지의 세계를 나온 여성들과 아직 그 세계에서 분투하는 여성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더 다양한 여성 서사가 필요하다.

대중은 〈봄밤〉이라는 현재를 지나 〈검블유〉 속 새로운 여성들을 발견하고 환영했다. 드라마뿐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에서 여성들은 낡은 세계를 사뿐하게 지르밟고, 미래로 달려가고 있다. 〈검블유〉 속 브라이언의 말처럼 “시대가 결국 선택하게 될 것을 미리 선택하는 것. 반대로 시대가 결국 버리게 될 것을 미리 버리는 것”이 타이밍이고, 그 타이밍이 이슈를 만든다. 이것이 바로 대중문화 장르지만 그보다 한발 더 나아간 〈검블유〉의 선택이고, 성취였다. 아버지 세계는 이미 망했고, 여성들은 탈출하여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타이밍’이 되었다.

기자명 오수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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