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한국일보사 건물에서 취미 화가 지망생들을 가르치러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사라진 건물인데 강의실이 9층인지 10층인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창문으로 옛 미국 대사관 직원들의 숙소가 보였다. 미국식 건물이 커다란 나무들과 녹지 사이에 서 있고, 높은 돌담이 사방을 둘러치고 있었다. 어쩐지 치외법권 지역을 느끼게 하는 광경이었다. 그림을 배우는 사람들은 가끔 그곳의 풍경을 스케치하기도 했다.
 
넓이 3만6642㎡에 달하는, 서울 종로구 송현동의 이 땅은 조선 시대에는 경복궁 바깥 숲 정원인 송현(松峴)이었다. 안평대군과 봉림대군의 사저가 있었고, 왕족과 고위 관리들의 집터로 나중에 친일파 윤덕영 형제의 소유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식산은행이 사들여 사택 부지로 썼다. 광복 후 미국 대사관 직원들의 숙소 터가 되었다가 오늘에 이르렀다. 상투적인 말로 오랜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곳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강홍구서울 종로구 송현동 공터. 미국 대사관 직원들의 숙소였다가 현재는 공터로 남아 있다.
미국 대사관 숙소가 이전한 뒤 송현동 공터에 뭔가 들어올 듯하다가 멈춘 지 벌써 17년이 지났다. 1997년 6월 삼성생명이 1400억원에 국방부로부터 부지를 매입했고, 2008년 대한항공이 2900억원에 다시 매입해 7성급 관광호텔 건립을 구상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한항공은 지난 2월 ‘연내 매각’ 계획을 발표했다.
이 땅의 활용을 둘러싸고 종로구청, 서울시, 민간단체 등에서 온갖 제안이 나오고 있다. 부지 매입 비용이 5000억원에 달하니 정부에서 지원해 그곳을 공원으로 바꾸자는 구상이 대세인 듯하다. 이곳은 서울의 핵심 요지에 있는 가장 커다란 공터일 것이다.
 
토지·부동산 전문가들은 공터가 도시 공간의 차등화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토지의 위치에 따라 결정되는 도시의 땅값은 일종의 ‘위치 자본’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차액 지대, 즉 돈을 얼마나 남길 수 있느냐에 따라 개발의 우선순위가 결정된다. 송현동 공터는 차액 지대를 많이 남기기에 적절하지 않은 위치에 있다. 주위에 학교가 너무 가깝고 지나치게 이목이 집중되는 중심부에 있어서 오히려 개발이 어렵게 된 셈이다.
 
이 분위기 유지하는 공원으로 조성되길
 
이 부지에 관심이 많아 그곳이 잘 보이는 건물에 가서 여러 번 사진을 찍었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풍광도 좋았고 망연히 저곳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보기도 했다. 역시 여러 사람들이 주장하듯 공원과 문화시설이 들어오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하다. 바로 옆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있으니 사진이나 영상미술관이 이곳에 생기면 좋겠지만 이는 망상에 지나지 않을 터이다.
 
다만 잡초가 무성한 지금의 이 분위기를 유지하는 공원이 조성되었으면 싶다. 어디선가 그럴듯한 나무들을 가져와 심거나 분수를 만드는 게 아니라 식생의 변화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도심 생태공원이라면 어떨까. 물론 공원 전체를 그렇게 만드는 일은 쉽지 않겠지만 일부라도 그냥 동네 공터 분위기를 살렸으면 좋겠다. 
기자명 강홍구 (사진가·고은사진미술관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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