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온천 여행이었다. 평범한 러시아인들이 이용하는 오제르키 온천, 온천수로 수영장을 만든 파라툰카 온천, 캠핑촌에 딸린 말키 온천 그리고 헬기 투어 때 들르는 호둣카 온천까지, 여행 일정을 짤 때 매일 마지막 일정으로 온천 체험을 배치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트레킹하며 쌓인 피로를 온천으로 풀 수 있었다. 온천이 효과적이었던 것은 캄차카반도 지역의 날씨 때문이었다.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이하 캄차츠키, 캄차카의 주도) 공항에 내렸을 때 거대한 실외 에어컨을 켠 듯한 느낌이었는데 여행 기간 내내 이 지역의 기온은 10~15℃ 정도를 기록했다. 우리와 동행한 한국인 가이드 정도욱씨는 “캄차카반도에 와서 가장 기온이 높았던 날도 25℃를 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피서’를 간다면서 한국보다 더 무더운 남방으로 떠나곤 한다. 더위를 피해 북방으로 향하는 상상력은 별로 발휘되지 않는다. 한여름에 ‘겨울의 맛’을 볼 수 있는 곳은 얼마든지 있다. 만주족 출신인 청나라 황실은 한여름에 베이징 북쪽의 청더(승덕)에 있는 호수 근처의 피서산장으로 가서 고향 만주의 음식을 보양식으로 먹으며 더위를 극복했다. 같은 북방민족인 우리에게 맞는 휴가지는 어디일까? 우리 민족의 시원지라고 알려진 바이칼 호수? 아니면 고선지 장군이 넘었다는 톈산산맥(천산산맥)?
 

ⓒ시사IN 윤무영캄차카반도의 크수다치 분화구 위에서 바라본 칼데라 호수 풍경.

북한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인지 우리의 휴가지 상상력은 남쪽으로만 발휘되었다. 물론 남방의 대규모 리조트 시설에 비해 북방의 여행 인프라가 열악한 것은 사실이다. 북방의 휴가지 중에서는 인프라가 좋은 일본 홋카이도 정도가 각광받는다. 홋카이도 말고도 여름에 찾기 좋은 북방 휴가지는 많다.

‘겨울의 맛’을 찾아 여름 휴가지를 정할 때 고려할 것은 위도와 고도다. 위도와 고도가 높은 지역에서 여름 속 겨울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위도만큼 중요한 고도는 대략 100m 올라갈 때마다 기온이 0.6℃ 정도 내려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높은 곳에서는 바람이 세기 마련이어서 체감온도는 더 떨어진다.

〈시사IN〉 트래블에서 진행한 여행 중에는 위도와 고도가 높아 이런 ‘겨울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많았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캅카스(코카서스) 지역이다. 지난여름 코카서스 대자연 기행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해발 2395m의 즈바리패스를 통과할 때 러시아-조지아 우정의 전망대에서 매서운 비바람을 맞아야 했다. 옷차림이 얇았던 참가자는 즈바리패스에서 옷깃을 세우고 비바람을 버텨야 했다. 즈바리패스 정상부에서는 얼음이 얼어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카즈베기산 아랫마을에 자리 잡은, 코카서스의 명물 룸스호텔에 도착해서는 한여름인데도 대부분 담요를 뒤집어쓰고 뜨거운 커피나 핫초코를 마시며 산을 바라보아야 했다. 이곳을 비롯해 아르메니아의 국민 휴양지 이제반 산장이나 세반 호수도 고도가 2000m 안팎이어서 대체로 서늘한 날씨를 경험하게 된다. 코카서스 여행을 갈 때 카자흐스탄 알마티 공항을 경유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알마티 공항에서 톈산산맥의 만년설을 감상할 수 있다.
 

ⓒ시사IN 고재열해발 3200m 높이에 있는 킬리만자로 분화구 위에서 맞이하는 일출(아래)은 장관이다.

아프리카에서 느끼는 겨울도 매력적

아프리카도 의외의 겨울을 느낄 수 있는 여행지다. 아프리카에서 겨울을 찾는다는 것이 황당하게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이다.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공항에 내리면 점퍼는 물론 코트를 입은 에티오피아인을 볼 수 있다. 아디스아바바의 고도가 2400m이기 때문이다. 케냐의 마사이마라 국립공원도 고도가 높아서 리조트에는 방마다 보온 물주머니가 준비되어 있다. 이곳에서 만난 러시아인 열기구 조종사는 시베리아의 도시 카잔이 고향인데 “지난여름에 이곳(케냐)이 너무 추워서 고생을 했다(마사이마라 공원은 남반구라 여름 기온이 더 낮다)”라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킬리만자로산은 제대로 추위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여행객들은 보통 마랑구 게이트를 통해 들어가 해발 2700m에 자리 잡은 만다라헛(산장)에 숙박하는데, 이곳은 밤에 오한이 들 정도로 추웠다. 남반구라 북반구에서는 볼 수 없는 별을 관찰할 수 있었지만 밖에 오래 있지 못했다. 이곳에서 숙박하고 다음 날 새벽 해발 3200m 높이의 분화구에 올라가 일출을 보고 내려오는데 추위에 단단히 대비해야 했다.

히말라야는 ‘더 추운’ 겨울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해발고도에 따라 날씨가 달라지기 때문에 사계절을 두루 경험할 수 있는데 ‘겨울의 맛’이 가장 진하다. 대부분의 트레킹은 1500m 내외에서 시작해 4000m 내외까지 오른다. 지난겨울 랑탕트레킹에서 들렀던 마지막 마을 캉진곰바(해발 3870m)에서는 함박눈부터 눈 폭풍까지 눈이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박지연 제공설산이 보이는 캄차카반도의 호둣카 노천온천에서 온천욕을 즐기는 모습.

 

캉진곰바 마을에서 처음 우리를 맞이한 것은 아직 녹지 않은 잔설이었다. 도착해서 휴식을 취할 때 보니 잔설이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날리며 뽀얗게 눈안개가 피어올랐다. 자고 일어나니 함박눈이 내렸고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매서워지면서 눈보라가 일었다. 저녁 무렵에는 산악인들이 ‘화이트 아웃’이라고 말하는, 시계가 전혀 열리지 않는 눈 폭풍이 일었다. 한 밤 더 자고 일어나니 전날 한 트레킹 참가자가 만든 눈사람이 밤새 내린 눈에 완전히 묻혀 있었다. 그렇게 쌓인 눈을 다시 매서운 바람이 날려 한쪽으로 몰아넣었다. 그렇게 무서웠던 눈이 헬기를 타고 내려올 무렵에는 햇빛을 반사하며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올봄에 갔던 일본 북알프스 지역의 다테야마 알펜루트는 의외의 겨울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원래 북알프스 지역은 설산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늦봄에 보는 설원은 이채로웠다. 해발 2000m 이상 고원 지역은 눈으로 덮여 있었고 해발 2400~2500m 높이에 자리 잡은 리조트 단지로 가려면 10m 이상의 눈 벽 사이의 길을 지나야 했다.

다테야마 알펜루트를 비롯해 여름은 일본 북알프스 산행의 최적기로 꼽히는데, 아베 정부의 무역 보복 조치로 인해 많이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잔설이 남아 있는 3000m급 고봉을 쨍한 날씨에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오르는 맛이 남다르다. 같은 3000m급인 타이완 아리산 일대도 여름에 가볼 만하다. 이 지역은 타이완의 이름난 차 산지이기도 해서 차밭 트레킹도 할 수 있다.

자, 이제 한여름에 진한 겨울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캄차카반도 차례다. 러시아의 극동지역에 혹주머니처럼 달려 있는 캄차카반도는 한국에서 의외로 가깝다. 직항편이 없어서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경유해야 한다. 만약 직항로가 개설된다면 4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거리다. 늠름한 설산 풍경이 공항에서부터 방문자를 맞이하는 캄차카반도는 최고의 여름 휴양지다.

캄차카반도에는 코략족 등 다양한 이누이트(에스키모) 원주민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여름철 3~4개월 일한 것으로 1년을 버텨야 하므로 한창 바쁘게 일할 때다. 예전 같으면 연어 등을 훈제해서 긴 겨울을 대비하느라 한눈팔 겨를이 없는데, 지금은 주로 관광객을 대상으로 전통문화 체험을 시켜준다. 몽골리안이라 우리와 생김새가 비슷하고 친근해 정을 느낄 수 있다.

캄차카반도 여행의 묘미는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원시 대자연 속으로 들어가보는 것이다. 그런 여행 코스 중 하나가 바로 빌루친스키 화산을 지나 무트놉스키 화산 밑의 간헐천 계곡을 트레킹하는 것이다. 캄차츠키 시내에서 무트놉스키 화산까지 가는 길이 험해서 덤프트럭을 개조한 카마즈 버스를 타고도 6시간 정도 걸린다. 그래서 2시간 정도 덜 걸리는 빌루친스키 화산 전망대와 인근의 폭포를 둘러보았다.

안개가 끼고 걷히며 보여주는 웅장한 자태

빌루친스키 계곡에서 일행을 맞이한 것은 강한 눈안개였다. 안개가 끼는데 바람에 쌓인 눈이 날려 시야를 가렸다. 기온도 낮아서 폭포를 보러 내려가는 길에 일행은 손을 호호 불면서 걸었다. 길이 눈에 덮이고 눈안개로 시야까지 좋지 않아서 러시아인 안전 가이드도 길을 헤맸다. 결국 폭포까지 가지 못하고 폭포가 보이는 전망대까지 가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캄차츠키 시내에서는 화산 봉우리 5개가 연달아 보인다. 가장 늠름한 두 봉우리가 코략스키 화산과 아바친스키 화산으로 트레킹 여행자들은 보통 그 두 화산 가운데 있는 낙타봉을 오른다. 1000m 높이의 고원을 2㎞ 정도 걸은 뒤 낙타봉의 오른쪽, 아바친스키 화산 쪽의 능선을 타고 올라가는데 여기에도 눈이 덮여 있다. 다른 쪽 능선은 화산재로 덮여 있고 발이 푹푹 빠져서 오르기 힘들지만, 이 능선 쪽은 눈을 밟으며 상대적으로 쉽게 오를 수 있다. 화산 가까운 곳의 눈은 사실 깨끗하지 않다. 화산재가 날려서 쌓이고 유황 성분 때문에 변색된다.

캄차카반도처럼 추운 지역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무한한 황량감이다. 특히 쿠릴 호수와 크수다치 칼데라 그리고 호둣카 노천온천을 차례로 들르는 헬기에 탑승하면 황량감의 극한을 맛볼 수 있다. 캄차츠키 시내를 벗어나면 곧 차도와 인가가 끊기고 설산들 사이로 그저 무한한 황무지가 보일 뿐이다. 자연 그대로 뻗어나간 강줄기와 산사태와 눈사태로 허물어진 사면이 황량감을 증폭시켜준다.

캄차카반도는 지난해 가을에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는 자작나무에 단풍이 들어 숲이 은은한 노란빛을 띠었는데 그 목가적인 풍경이 서양 유화를 보는 듯했다. 여름에 본 캄차카반도는 시시때때로 안개가 끼고 걷히며 웅장한 자태를 보여줄 듯 말 듯해 신비로움을 더했다. 강가나 숲에 가면 모기가 좀 있지만 원시의 대자연을 그대로 느끼기에는 여름이 더 좋았다.

캄차카반도의 여행 산업은 미국의 러시아 경제제재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 관광객을 겨냥한 투자가 조금씩 이뤄지다가 현재는 대부분 중단된 상태다. 괌에서 리조트를 운영하는 조민숙씨는 “원래 괌-캄차카 직항 노선이 개설될 예정이었다. 그래서 여름과 겨울 시장을 서로 겨냥하려고 했는데 미국의 러시아 경제제재 때문에 중단되었다”라고 말했다.

캄차카반도를 여행하는 사람은 모스크바 등지에서 온 러시아인과 일본인 그리고 중국인 정도다. 성수기에는 도쿄에서 캄차츠키로 전세기가 뜰 정도로 일본 관광객이 몰리는데, 요즘은 중국 관광객도 제법 눈에 띈다. 한국 여행객은 산악 트레킹 전문 여행사를 중심으로 조금씩 늘고 있다. 추위와 산에 익숙한 한국 관광객에게 캄차카반도는 최고 여행지로 추천할 만하다.

이렇게 캄차카에서 코카서스까지 한여름에 ‘겨울의 맛’을 볼 수 있는 북방의 여행지는 두루 있다. 다만 남방의 고급 리조트와 같은 여행 인프라는 조성되어 있지 못하다. 중국 대기업들이 앞다퉈 온천을 개발 중인 백두산 지역, 그동안 독점 노선이었다가 아시아나항공이 새로 취항한 몽골의 사막과 산들,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파미르고원을 가로지르는 파미르 하이웨이(M41) 등 우리를 기다리는 미지의 여행지는 많다.

 

기자명 러시아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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