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민은 왜 거친 바다에 뛰어들어야만 했을까. 배를 타는 사람은 어쩌다 먼바다를 건너 잘 모르는 지역까지 가게 되었을까. 바다와 인간의 관계를 규정했던 더 큰 문화를 생각해봐야 한다. 예를 들어 유럽의 탐험가와 상인들이 초콜릿, 커피, 차 같은 기호품을 찾아 아주 오래전부터 바닷길을 항해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현대 글로벌 자본주의의 기원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카페에 앉아 커피나 차 등을 마시는 개인적인 행위가 거대한 자본주의의 소용돌이를 만든 원동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우리의 근대는 달랐다. 명나라 이후 해금(海禁)정책에 묶여, 표류하지 않는 이상 이웃나라에 가볼 수 없었다. 적어도 조선 후기 사람들이, 심지어 상층 계급에서조차도 바다 너머에서 들어온 물건을 일상적으로 소비했다는 기록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바다 너머에서 들어온 물건은 아니지만, 바다에서 나온 해산물 없이는 일상이 유지될 수 없음을 쉽게 알 수 있다. 2018년 유럽위원회 공동연구센터(JRC) 발표에 따르면 1인당 연간 해산물 소비량이 가장 많은 나라가 바로 한국(78.5㎏)이다. 이어 노르웨이(66.6㎏), 포르투갈(61.5㎏), 미얀마(59.5㎏), 말레이시아(58㎏) 순서다. 우리는 해산물을 매우 빈번히, 많이 먹고 있다.

ⓒ한국민속전통견지협회해산물은 한국인에게 신분 정체성을 나타내는 문화적 상징이었다.
위는 조선 시대 말기 어물전 모습.


이러한 한국인의 해산물 소비는 조선 말기 개항 이후에 생겨난 새로운 현상일까? 특정 해산물에 대한 선호는 매우 문화적이며 역사적으로 형성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전 세계에서 즐겨 먹는 육고기는 몇 종류 되지 않지만 해산물의 종류는 문화권별로 다양하다. 예를 들어 한국이나 일본에서 선호하는 해산물인 문어가 북유럽에서 악마의 물고기로 치부되어 식용이 금기시되었다는 점은 익히 알려져 있다. 요즘은 비싼 값에 팔리는 맛있는 삼치도 조선 후기 삼남 지방에서는 ‘망어(䰶魚)’라고 불렸다. 양반가에서는 식용은 물론이고 집안에 들이는 것조차 꺼렸다. 수많은 물자가 자유롭게 유통되고 소비되고 있는 지금도 그 독특한 맛과 향, 외형으로 인해 익숙하지 않은 해산물은 본능적으로 꺼리게 된다.

20세기 초반 내륙 지방인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지역 상층 양반집. ‘구례 운조루’로 알려진 집안에서 남긴 문서를 살펴보자. 이 문서는 일상 속 해산물 소비가 단백질 보충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긴밀히 연결된 문화적 현상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923년 겨울 장녀(15세)를 구례군 용방면 두동에 사는 전주 이씨 집안에 시집보내며 잔치를 열었다. 지인들로부터 혼례용 물품을 부조받고, 93원 13전 4리를 지출해 물품 49종을 구입하는 등 모두 54종의 물품을 마련했다.

부조는 모두 18곳에서 들어왔는데, 부조품 중에는 달걀 다음으로 생선인 대구(大口)가 가장 많았다(문헌에는 ‘水口’라고 적혔다). 또 해삼 20마리, 북어 20마리, 백문어 1마리, 피문어 3마리, 홍합 5꼬치, 백합 20개, 꼬막 1되, 김 5묶음, 전복 2개, 미역 4줄기, 건어 1마리, 전어 20마리, 조기 4마리, 멸치 1되 등 다양한 해산물 16종이 마련되었다.

 

ⓒ오창현 제공오른쪽은 구례군 운조루 집안에서 혼례용 물품을 부조받은 목록. 수많은 해산물이 망라됐다.


이러한 해산물은 잔치에 부수적인 것이 아니었다. 흔히 “○○ 없는 잔치는 먹을 것이 없다”라고 말해지는 필수품이었다. 언급한 해산물 중 문어는 전라·경상·강원도까지 널리 사용되는 잔치 음식 중 하나다. 홍합은 전라·경상도 남해안 지방에서 사용되는 의례품이다. 특히 꼬막은 삭힌 홍어와 함께 전라도 잔치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포항에선 개복치가 중요한 잔치 음식

해산물이 한국인에게 중요한 문화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비단 전남 구례군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눈을 조금만 돌리면 지방별로 꼬막에 해당하는 해산물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개복치는 경북 포항 주변에서 매우 중요한 잔치 음식이었다. 지금도 전국, 심지어 타이완 해역에서 잡힌 개복치도 포항으로 모인다. 경북 안동 주변 지방에서는 좀 특별한 제사 음식이 있는데, 물고기·육고기·닭고기를 높이 쌓은 ‘도적’이 그것이다. 흔히 바다·육지·하늘, 즉 세계를 상징하는 제물을 쌓아 조상께 올리는 것이라고 한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경북 안동의 하회 류씨 집안에서 바다·육지·하늘을 상징하는 제물로 ‘도적’을 쌓고 있다.


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근현대 이전으로 가보자. 해산물 소비는 제대로 된 손님 접대 여부뿐 아니라, 신분 정체성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15세기 말 편찬된 〈경국대전〉의 봉사조(奉祀條)에서 “6품 이상 문무관은 부모·조부모·증조부모의 3대까지, 7품 이하는 2대까지, 서인(庶人)은 단지 부모에게만 제사 지낸다”라고 해 신분에 따른 차등 봉사(제사)를 규정하고 있다. 조선 후기 이후의 전통에 따라 과거 ‘4대 봉사’(4대에 걸친 조상들의 제사를 지냄)가 일반적인 규범이었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일 수 있다. 신분에 따라 의례 형식과 구체적인 의례품을 제한하는 것은 왕이 존재하는 신분제 국가에서는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 내내 금약령을 내려, 평민이 먹는 일상적인 음식의 종류와 가짓수, 양까지 규제함으로써 신분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조선 시대 차등 봉사는 제사를 올리는 대상뿐 아니라, 제물의 종류와 가짓수도 신분에 따라 제한했다. 〈경국대전〉보다 2년 먼저 완성된 〈국조오례의 (國朝五禮儀)〉는 ‘대부사서인(大夫士庶人)’ 즉 관료와 서민의 시향(시제), 기일, 속절(설·단오·추석·동지) 제례 시 올리는 음식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2품 이상 고위 관직의 경우에는 상 앞에서부터 1행에 과일 다섯 가지를, 2행에 채소 세 가지와 포(말린 것)와 해(절인 것)를 놓았다. 3행에는 면·떡·어·육·적간(구운 간)을 각기 하나씩 놓고, 4행에는 밥·갱(일종의 국)·수저 한 쌍을, 5행에는 잔을 6개 놓았다. 6품의 경우에는 제물이 5행이 아니라 4행으로 줄어들면서, 제물의 가짓수가 조금씩 줄어든다. 9품 이상의 경우에는 제물이 4행으로 유지되지만 종류와 가짓수가 줄어 면·떡·채소가 없다. 마지막으로 관직이 없는 서인의 제물에서는 9품 이상과 달리 육고기와 함께 어물이 사라졌다.

물론 〈국조오례의〉 규정을 따르지 않고 후손들이 제사상에 올리고 싶은 것을 올렸던 것은 아닌가 의심해볼 수도 있다. 농사일을 하며 소, 돼지, 닭 따위 가축을 키우고 틈틈이 바다나 강에서 어로에 종사하는 이라면 물고기와 육고기를 그리 어렵지 않게 마련했을 것이다. 조선 후기 이후 발달한 시장에서 물품을 구했을 수도 있다.

시장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 내륙 지방 거주민은 해산물을 어떻게 얻어 소비했을까? 〈미암일기(眉巖日記)〉는 중종 말년인 1567년부터 선조 초인 1577년까지 중앙 정계에서 활동한 고위 사대부인 유희춘이 일상을 적은 수필형 일기이다. 역사학자인 이성임 박사가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10년간 유희춘이 선물을 받은 횟수는 2855회에 달했다. 반면 교환을 통해 물건을 구매한 횟수는 66회로 1년에 6~7회에 불과하다. 이러한 선물의 경제적 가치는 녹봉, 노비의 신공(노동력 제공 대신 바치는 물품), 경작 소출보다도 더 컸다. 무엇보다 녹봉과 경작지 소출이 곡식과 면포에 집중되었던 것에 비해 선물은 문방구류·용구류·포육류·어패류·과채류 등을 망라하고 있었다.

1568년 한 해만 보더라도 유희춘이 해산물을 선물받은 횟수가 200회 넘었다. 거의 매일 해산물을 선물로 받은 셈이다. 1568년 1월 한 달 동안만 15차례 이상 해산물을 선물로 받았다. 당시에 사대부 집안의 제례품은 관에서 마련해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문헌에 등장하는 해산물만 살펴보더라도 그 수와 종류가 놀라울 정도이다. 선어 상태이거나 건조한 숭어 80마리, 숭어젓 4편, 민어 5마리, 잡젓 1말, 석화 1말, 전복 585개, 청어 110마리, 굴 3그릇, 홍합 2말, 김 30줄 이상, 문어 2마리 이상, 건어 263마리 이상이었다. 여기에 민물고기인 은어도 40마리나 있다. 수량을 세는 단위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략 계산하더라도 작은 생선 가게를 차릴 만한 양이었다. 이와 같은 해산물은 지방 수령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이 대부분이고, 종종 친지의 선물, 왕의 하사품이나 공물 배분을 통해 얻기도 했다.

유희춘과 달리 평생 관직에 진출하지 못했고 임진왜란을 겪었던 오희문이 작성한 〈쇄미록〉을 보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일기에 등장하는 음식을 보면, 수조육류(獸鳥肉類)는 소·돼지· 사슴·노루·양·곰·여우·참새·말·닭·꿩 등 11종인데, 꿩고기가 가장 많고 이어 노루고기, 닭고기 순서였다. 반면 해산물은 가자미·갈치·고등어·광어·농어· 대구·도미 등 어류 44종, 연체류 4종, 패류 6종, 여기에 생선알이 더해졌다. 전란의 와중에도 상당히 다양한 해산물을 풍부하게 얻어 소비했음을 알 수 있다. 오희문이 관직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거주지 인근 지방관과 관직에 진출한 일가친척한테 선물로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산물을 제사상에 올릴 수 없던 서민들

해산물이 가격으로 환산되는 ‘냉혹한’ 시장의 원리가 작동하지 하지 않는 시대에, 밥상이나 제사상 위에 놓인 해산물은 사회적 관계를 함축했다. 신분이나 동원 가능한 인간관계의 제약으로 인해, 해산물을 제사상에 올릴 수 없는 서민 처지에서 해산물은 어떤 의미였을까 상상해보자. 의례용 해산물이 고루한 전통이 아니라, 지난한 신분 투쟁의 역동적 산물임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지 않은가. 수입이 제한되던 시절에 선물로 받은 장난감 레고와 가까운 마트에서 구입할 수 있는 레고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어느 집이든 조기·명태·문어 등 해산물을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고, 제사상이나 잔칫상에 올릴 수 있다. 남한 혼례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지만, 북한에서는 가장 크고 좋은 해산물을 혼례상 한가운데 놓는 등 해산물의 상징적 가치가 여전히 높다고 한다. 지금도 여전히 쓰이는 “○○가 없으면 잔치가 아니다”라는 말은 단순히 손님이 선호하는 음식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행사를 준비한 사람의 정성이나 배려, 구체적으로는 일정 수준의 재력과 시간 투자가 필요함을 뜻한다. 반대로, 이는 사회적 유대를 유지하는 장면에서 특정한 사물, 특정한 물고기가 필요하다는 문화적 사실과도 관련된다. 다음 연재 글에서는 이 점을 파고 들어가 일본 제국주의 확장에 큰 영향을 미친 도미라는 물고기의 힘에 대해 살펴보겠다.

기자명 오창현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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