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임브리지 공산당은 셀윈 정원사 로리 맥펀(위)에게 당권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당을 해체해버렸다.
전세계적 금융위기 속에 영국 시민 역시 불안한 연말을 맞이하고 있다. 텔레비전에서는 성탄절 선물을 사는 것이 맞나, 사지 않는 것이 맞나 하는 것을 가지고 토론을 하고, 도심 소매상은 성탄절까지 특별 세일을 하며 소비자의 구매 욕구를 자극한다. 그래서인지 매장에서 구경하는 사람보다 계산대에 줄 서 있는 사람이 조금은 많아진 것 같다. 또 영국에는 복싱 데이라 불리는 12월26일에 5~80%에 달하는 세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금융위기에 실질적으로 혹은 심리적으로 영향을 받는 대다수 영국 시민에게는 이런 연말 세일이 약간의 위로가 될는지 모른다.

영국에 살면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보고 얘기해보았는데 그 중 케임브리지 대학 칼리지 정원사들이 가장 인상 깊게 남는다. 연말을 맞아 영국의 보통 사람인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로리 맥펀, 1979년 스코틀랜드 출생으로 셀윈 칼리지 정원사로 근무한 지는 7년 정도 되었다. 듬성듬성하면서 흐트러진 머리 모양과 새까맣게 변한 앞니, 정원복과 일상복의 구분이 없는 복장 등으로 인해 케임브리지 신입생에게는 집 없는 사람이나 정신이상자로 여겨져 신고되기도 한다. 그는 정원 일로 먹고사는 것을 해결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본업은 ‘비출판 소설가’라고 말한다. 실제로 혼자 집필한 소설이 몇 편 있다. 주요 내용은 무인도에 건설하는 새로운 나라에 대한 얘기이거나 두 여성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얘기 따위이다. 그림 실력도 대단하다. 싸구려 볼펜으로 수정액도 없이 셀윈 칼리지의 조감도를 훌륭하게 그려낸다. 아는 것도 매우 많다. 언제 어디서 전쟁이 나고 쿠데타가 일어났는지, 그 나라의 인구가 몇 명인지 등 모르는 게 없다.

가장 흥미로운 건, 로리가 올해 초 해체된 케임브리지 공산당원 3명 중 한 명이었다는 점이다. 나머지 두 명은 각각 81, 82세의 고집 센 영국 초기 공산당원이다. 둘 다 연로해서 더 이상 당을 이끌 여력이 없는데, 로리에게는 당권을 물려주기 싫어 당을 해체해버렸다고 한다. 매월 마지막 목요일에 당원 모임을 영국 선술집(‘펍’이라고 부른다)에서 열었는데, 거기 한번 가볼 기회를 갖기도 전에 당이 해체되어버려서 매우 아쉬웠다. 로리에게 들은 얘기로는, 이 두 명의 영국 초기 공산당원은 옛 소련의 기아와 독재가 모두 서구 언론의 조작이라 믿었다고 한다. 쿠바에 가본 로리의 말에 따르면 아바나가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한다. 그런 그에게 케임브리지 정원은 그다지 감동적이거나 아름다운 곳은 아니었다.

‘무료 점심’ 요구했다 6개월간 징계받아

케임브리지는 어디를 가든 위계적이고 귄위를 중시한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개개인의 신분에 따라 구분된다. 정원도 예외가 아니다. 한 예로 정식 정원사 4명으로 구성된 정원팀 중 팀장에게만 점심이 공짜로 제공된다. 나머지는 샌드위치를 싸오거나 식당에서 사먹어야 한다. 식당에 들어가도 학장과 연구자가 앉는 자리는 별도의 높은 식탁이 마련되어 있고, 그 아래 직원이 앉는 자리, 학생이 앉는 자리가 모두 구분되어 있다. 자리가 다 차면 정원팀장 이외의 직원은 아예 들어가지도 못한다. 로리가 이의를 제기했다. “나머지 정원사에게도 무료 점심을 제공하라.” 팀장이 안 된다고 하자 로리는 소리쳤다, 왜 안 되느냐고. 결과는 ‘참혹’했다. 로리는 6개월간의 ‘보호관찰(probation)’ 처분을 받았다. 그 이후로 공짜 점심 얘기는 사라졌다.

셀윈 정원에서 본 케임브리지 대학 셀윈 칼리지. 케임브리지 대학에는 칼리지가 100여 개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정원사의 이익을 대변하는 로리가 정원사 사이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매우 게으른 데다 목소리가 크면서 말이 많고 실수도 잦다. 실제로 내가 처음 출근한 날 로리는 정원 일을 지원한 동양 여성이 없었다며 필자에게 이것저것 캐물었다. 자기 할 일은 팽개치고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질문 내용이 매우 귀찮고 대답하기 곤란하며, 옆에서 듣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전혀 없을 만한 그런 내용이었다. 예를 들면, 남북이 왜 싸웠느냐, 지금도 사이가 안 좋으냐, 북한에는 가봤느냐, 가면 어떻게 되느냐, 북한 사람은 만나봤느냐, 북한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김정일이 공산주의자가 맞느냐, 미국을 이길 수 있겠느냐, 남한이 미국에 진 빚이 얼마냐, 전쟁 때문에 부서진 건 다 고쳐놨느냐, 데모는 왜 하느냐 등. 축구에나 관심이 있는 나머지 정원사에게 이런 얘기는 그저 소음일 뿐이다. 그렇지만 필자에게는 고민과 부연 설명이 많이 필요한 그런 난감한 질문이었다.
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로리이지만 지식과 관심 분야가 극동지역에까지 자세하게 미치는 것을 보면 웬만큼 유수한 대학을 나온 영국인보다 수준이 더 높음을 알 수 있다. 정원팀장은 한 달이 넘도록 필자가 베트남에서 온 걸로 헷갈려했다.

56세의 싱글인 팀장 폴 갤런트는 무의식적으로 성차별·인종차별 기미가 보이는 발언을 종종 한다. 여자는 운전을 하지 말아야 한다든지, 뚱뚱한 여성을 코끼리라 부른다든지(뚱뚱한 남성에게는 별명이 없다), 동양인이 머리를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것을 서양인에 대한 열등감의 표현으로 본다든지 하는 것이 그 예이다.  필자가 들어가기 전까지 정원은 여자가 와서는 안 될 곳이라는 말을 종종 했다고 한다. 필자가 일을 시작한 이후로는 적어도 공개 석상에서 그런 말을 들어보지는 못했다. 다른 정원사(모두 남성)와 같이 일을 시켜보니 여성인 필자가 더 책임감 있게 해내는 것을 보고 마음을 바꿔먹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다른 정원사보다 필자가 더 일을 잘한다고 칭찬을 하니 말이다.

폴이 가장 아끼는 정원사는 나이 어린 24세 청년 샘 윅스이다. 샘은 키가 2m 정도 되는 장신인데, 축구 얘기 말고는 말이 거의 없다. 정원 일에 관심도 있고 무엇보다 로리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샘뿐이다. 지난해만 해도 넘버 3였는데 올해 들어 폴 다음 넘버 2로 등극한 것처럼 보인다. 폴이 없을 때 샘이 대리를 한다. 카리스마가 있지만 연장자에 대한 예우는 기대할 수 없다. 물론 필자가 유교 문화권에서 와서 그렇게 느끼는 것이겠지만, 영국에서는 노년층에 대한 경시 풍조가 일반인 사이에 만연한 것을 느낄 수 있다. 늙으면 냄새가 나고 잘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셀윈 정원사. 왼쪽부터 팀장 폴 갤런트, ‘친애하는 지도자’ 폴 보들리, 넘버2 샘 윅스, 로리 맥펀.
마지막으로 셀윈 정원에 가장 오래 근무한 폴 보들리(22년 근무)는 친절하고 사교성이 좋은 정원사이다. 정원팀에 폴이 두 명 있기 때문에 난 이들을 각각 ‘위대한 영도자’와 ‘친애하는 지도자’라 부른다. 이것이 정원팀 내부에서는 이미 통용되고 있다. 지난해까지는 ‘친애하는 지도자’ 폴이 넘버 2여서 괜찮았는데, 올해부터는 샘이 그 위치를 차지하게 되어서, ‘친애하는 지도자’가 ‘위대한 영도자’가 되기는 힘들 것 같다. 폴의 가장 큰 걱정은 여자친구이다. 열두 살 연하인 폴의 여자친구 린다는 언어장애가 있어서 직장을 구할 수 없다. 그래서 정부보조금과 부모 도움으로 살아간다. 직장을 구해도 봤지만 정부보조금보다 최저임금이 더 낮기 때문에 오히려 손해여서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정원에는 손님이 많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정원은 정원사의 성격에 따라 반듯하고 정리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조건 전세계 식물을 종류별로 모아 진열하기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잡초조차 정원의 일부로 생각해 그대로 놓아두어 정글처럼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이웃 칼리지인 뉴넘 칼리지의 정원팀장 토니가 우리 셀윈 칼리지에 놀러와서 정원이 왜 이 모양이냐고 ‘위대한 영도자’ 폴에게 핀잔을 주었다. 뉴넘 칼리지는 셀윈보다 규모도 몇 배나 크고 정원에 배정된 예산, 고용된 직원도 훨씬 많다. 게다가 토니는 영국 전체 프로 정원사 길드의 회장이다. 그 말을 들은 폴은 자존심이 상해서, 오래된 컴퓨터 한 대만 달랑 있는 허름하고 조그만 자기 사무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토니와 얘기하지 않았다. 나머지 정원사와 필자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위대한 영도자’가 말을 잃은 까닭

셀윈 정원은 내게 많은 것을 주었다. 죽어가는 꽃과 살아남을 것 같지 않은 꽃 몽우리를 사정 없이 잘라내면서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다윈의 진화론과 자본주의를 생각하고, 훌륭한 정원의 기본인 잘 정돈된 잔디를 위해 더 건강히 자라난 잔디도 가차 없이 한 줄로 맞춰 자르면서 부의 축적 없이 모두가 공평하게 생산수단을 점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에 대한 사색의 공간을 주었던 곳이 바로 케임브리지의 정원이다. 강하게 뿌리내린 잡초 하나가 아름다운 꽃을 망치지 않도록 뿌리째 뽑아내면서 사회에서 필요한 규범과 통제·안전장치의 구실을 생각한다. 또 내년에 옮겨 심기 위해 올해부터 정성스레 충분한 영양을 주고 키우면서 교육의 소중함을 깨닫기도 했다.

셀윈 정원사. 왼쪽부터 팀장 폴 갤런트, ‘친애하는 지도자’ 폴 보들리, 넘버2 샘 윅스, 로리 맥펀.
기자명 케임브리지·송지영 (자유 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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