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출간될 한 책에 추천의 글을 썼다. 스스로를 ‘남자 집사람’이라고 일컫는 이가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것을 넘어 생활로 실천하고자 노력했던 일화를 엮은 책이다. 페미니즘을 통해 자신의 남성성을 점검하고, 사랑하는 이를 짝으로 맞아 여성, 살림, 돌봄, 환경, 공동체를 생각하는 남자 집사람의 이야기가 생생했다.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페미니스트 생활사’가 존재하는지, 존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참으로 시의적절한 예시가 될 것이다, 라는 추천사를 적으면서 ‘페미니즘 성장통’이라는 책 속의 말을 더듬어보았다. 페미니즘 성장통이란 페미니즘과 만나면서 맞이하게 되는 다양한 ‘현타(현실 자각 타임)’를 일컫는다.
페미니즘은 한 사람의 생활을 관통하는 흐름
나 역시 시시때때로 페미니즘 성장통을 앓았다. 한 여성문화예술단체에서 자원 활동을 하던 때의 일이다. 스스로를 자신 있게 페미니스트로 떠벌리고 다니던 때였는데, 어느 날 한 상근 활동가가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엄마가 빨아준 옷 입고, 엄마가 청소해주는 집에서 살죠?”라고 물었다. 아들로서의 나와, 엄마로서의 여성과 가부장제의 서열을 살피게 하는 여성 활동가의 말을 통해 나는 페미니즘이 한 사람의 생활, 삶을 관통하는 흐름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위대한 사람이 되려는 욕심보다 요리나 청소 같은 삶의 작은 단위부터 가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남자 집사람의 태도를 ‘페미니즘적’이라고 여기는 건 그때 나를 통과해간 성장통 덕이다.
페미니즘 성장통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니 최근 한 시인의 대필 사건이 떠오른다.
김경주 시인이 2016년 미디어 아티스트 흑표범의 세월호 전시 도록에 수록한 글과 비슷한 시기 도서관 소식지에 발표한 글이 후배 작가 차현지가 대필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스스로 대필 사실을 고백”했다지만, ‘파급력’을 운운하며 차현지에게 메일을 먼저 보낸 후에 뜻한 대로 되지 않자 자진 신고한 셈이다. 대필을 두고 두 사람의 의견은 엇갈렸다. 제안한 사람은 “협의에 의해”라고 말했고, 제안받은 사람은 “선후배라는 상하관계에서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뒤이어 김경주 시인은 한 매체에 사과문을 발표했다. 협의했으므로 착취하지 않았고, 자신이 인격적으로 부족했다는, 사과와 변명 사이에 있는 글이었다. “앞으로 그러한 부분에 대해 감수성을 기르도록 하겠습니다” “살면서 이러한 일이 없도록 뼛속 깊이 반성하겠습니다”라는 그의 말을 보며 그에게 ‘그러한 부분’과 ‘이러한 일’이란 뭘까 (글을 봐도 알 수 없으므로) 알고 싶어졌다. 그는 어째서 여성, 제자, 후배, 신인, 작가에게 대필을 제안하는 게 불편하지 않았을까. 부끄럽지 않았을까. 그런 안하무인을 가능케 한 힘이 ‘위력’이라고 그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걸까. 미투 운동을 통해 많은 이들이 가해자의 언어와 논리를 살펴볼 때 과연 그는 어디쯤에서 눈감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자신의 인간적인 약점이나 예술가로서의 박약함에 대한 자책에 머물지 않고, 한 ‘남자 사람’의 성인지감수성 탐구로까지 나아가는 ‘현실 자각 타임’은 꽤 곤란한 것일 테다. 그러나 페미니즘 성장통을 앓고 난 이후의 삶을 누군가는 계속해서 기록하고 있다. 자신의 영향력을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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