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연사’로서 초청받은 때는 2016년이었다. 재학 중이던 대학에서 TEDx 강연회가 열렸는데, 당시 대학원생인 나를 섭외하고 싶다며 연락이 왔다. 처음에는 ‘왜 평범한 대학원생인 나를 초청했지?’ 의아함을 느꼈다. 강연회 주제를 듣고 의문이 풀렸다. 주제는 ‘Unlimited(한계를 넘어선)’였다. 기획자는 내가 청각장애를 극복하고 대학 시절 다양한 학내외 활동을 해왔던 경험을 말해주기 원하는 것 같았다.

당시 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에게 ‘역경을 극복한 경험’을 듣기를 원하는 상황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담당자에게 역으로 제안했다. 장애에 대해 이야기하겠지만 역경 극복이 아닌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이다. 강연을 이런 말로 시작했다. “저는 청각장애인입니다. 그리고… (여러 활동을 한 슬라이드를 보여주며) 이렇게 다양한 활동들을 했죠. 이제 여러분은 생각하실 거예요. 아, 오늘 주제와 관련해서, 어떻게 장애라는 한계를 극복했는지 이야기하겠구나. 그런데 저는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그날 강연은 반응이 좋았다. 청중도 집중해서 들어주었고, 끝나고도 강연을 인상적으로 들었다는 메시지를 많이 받았다.

ⓒ한성원


한 달 뒤에는 정반대 경험을 했다. 학교에서 주최한 짧은 스피치 대회 본선에 나가게 되었다. 자신의 연구 내용을 무대에서 소개하는 그 행사에서, 나는 청중에게 청각장애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스피치 내용은 장애와 아무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심사위원들에게는 질의응답이 매끄럽지 않을 수 있음을 미리 알렸다. 호응을 끌어내지는 못했지만 스피치는 사고 없이 끝났다. 그런데 한 심사위원이, 내 발표가 끝난 직후 청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방금 발표한 학생이 발음이 좀 어색하다고 느꼈을 수 있는데, 청각장애를 가진 학생입니다.” 그는 나를 칭찬했지만 나는 당황스러웠다.

소설가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사람들 앞에 설 기회가 여러 번 생겼다. 생방송 촬영, 북토크, 강연, 크고 작은 규모의 무대에 서는 일이 반복되었다. 나는 앞선 두 번의 경험을 생각하며 때마다 다르게 대처했다. 생방송이나 규모가 큰 강연, 마이크를 써야 하는 장소에서는 말이 울려 불분명하게 전달될 우려가 있었고, 시작하기 전 미리 양해를 구했다. 그런 한편 마이크를 쓰지 않는 소규모 행사에서는 그냥 진행하며 반응을 살필 때도 많았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내가 무대에 서서 청각장애인임을 밝히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나의 ‘장애’에 주목하는 것 같았다. 작가가 된 이후 장애를 주제로 강연을 해본 적은 없는데도 말이다. 청각장애인이라는 선언은 꽤 강력한 나머지, 때로는 강연 내용 그 자체보다 더 인상에 남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행사가 끝나고 나에게 “장애가 있어 말하기 불편하실 텐데, 그래도 잘 들었어요”라고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주시는 분들에게서 그런 인상을 받았다. 일종의 딜레마였다.

어떤 장애는 비가시적이다. 이를 보이지 않는 장애(Invisible Disability) 혹은 숨겨진 장애(Hidden Disability) 라고도 한다. 장애인을 나타내는 픽토그램은 휠체어와 보조기기를 표현하여 장애를 가시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많은 종류의 장애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내부기관에 장애가 있지만 별다른 보조기기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단지 몸이 아픈 사람으로만 보일 것이다. 청각장애인 중 상당수는 수화 대신 음성언어를 주된 언어로 사용하는데, 이렇게 ‘구화’를 쓰는 청각장애인들은 장애인으로 여겨지기보다는 발음이나 억양이 어색한 사람으로, 때로는 외국인이나 교포로 오해를 받는다.

만성통증 혹은 질병으로 인한 장애 역시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여성학자 수전 웬델은 〈거부당한 몸〉에서 근육통성 뇌척수염으로 활동상의 장애를 갖게 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질병과 장애에 관한 사회적 편견을 고찰해본다. 만성질병으로 인한 일상생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외견상으로 아파 보이지 않았고 여전히 많은 활동을 잘 해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수전 웬델이 장애를 갖고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황, 한계와 고통을 거듭 설명하는 일을 겪어야 했다.

장애를 드러내기 전까지 비가시적 장애인이 겪는 일상생활의 문제들은 그 사람이 가진 여러 결함의 총합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청각장애인은 청각장애를 드러내기 전까지는 부주의하거나, 이해력이 떨어지거나, 산만한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고충에 대해 이야기하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 당당하게 장애를 드러내고 배려받으면 되잖아요?”

장애를 숨기고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

상황은 쉽지 않다. 난청인 커뮤니티에서는 장애를 숨기고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장애를 드러내는 순간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의 한복판에 위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장애로 인해 승진에서 배제되고, 중요한 일을 맡지 못하며, 해고당하는 일을 걱정했다. 내가 강연을 갈 때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것도 이러한 상황과 맞닿아 있다. 한 사람이 장애인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너무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그 사람이 가진 다른 특성들을 덮어버린다.

 

ⓒAP Photo여성학자 수전 웬델은 근육통성 뇌척수염을 앓으면서 질병과 장애에 대한 편견을 고찰했다.


비가시적 장애인들은 장애를 드러냈을 때 받을 차별과 혐오가 더 두렵기 때문에 자신의 장애를 부정하고 숨긴다. 장애를 최대한 숨긴 상태에서 정상성을 수행하려 노력한다. 그 수행은 자주 실패하며 그 과정에서 비가시적 장애인들은 많은 곤혹을 겪는다. 그럼에도 장애를 숨기려는 일은 계속 이어진다.

만약 기술이 발달해서 장애를 보완하거나 신체를 쉽게 교체할 수 있게 된다면 이런 현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장애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단지 기능상의 결함에 근거하는 것이라면, 기술의 발달은 장애인 사이보그들을 가시화하게 될지도 모른다. SF 영화에는 사이보그들이 자신의 기계 몸을 드러내고 활동하는 미래 사회가 자주 등장하지 않던가.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기술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지 않다.

청각장애의 보조기기는 원래 보이지 않던 장애를 보조기기를 착용함으로써 드러낸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보청기 회사의 주된 목표 중 하나는, 이러한 ‘장애 가시화’에 거부감을 갖는 고객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보청기는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극도로 소형화되어왔다. 세계적인 보청기 회사 포낙(Phonak)과 스타키(Starkey)의 제품 홍보 사이트를 살펴보면, 외관상 눈에 잘 띄지 않는 귓속형 제품들을 가장 많이 구비하고 있으며 보청기가 작고 눈에 띄지 않음을 강조한다. 제품에는 ‘귓속에 쏙 들어가는’ ‘눈에 거의 띄지 않는’ ‘착용 시 거의 보이지 않는’ 따위의 수식어가 붙어 있다. 그 외에도 거의 모든 보청기 회사에서 ‘크기가 작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장점으로 홍보하고 있었다. 이는 청각장애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용자들의 요구를 적극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인공와우(인공 달팽이관)의 경우에도 유사한 요구가 있다. 인공와우는 내부 장치와 외부 장치(어음처리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어음처리기는 머리 외부에 착용하는 것이므로 겉에서 보일 수 있다. 최근 출시된 일체형 어음처리기 ‘론도’는 다른 귀걸이형 어음처리기에 비해 작고 감추기 쉬운 디자인을 강조한다. 여러 색상을 가진 머리카락 무늬의 커버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렇게 잘 드러나지 않는 인공와우에 대한 수요가 있으므로, 외부 장치가 아예 없거나 외부 장치가 더욱 소형화된 인공와우 역시 개발 중이다.

한국기계연구원에서 개발해 국내 최초로 상용화된 ‘스마트 로봇 의족’에는 ‘마치 살아 있는 다리 같은’ ‘실제 사람의 발목처럼 움직임이 자연스러운’ 따위 수식어가 붙는다. 로봇 의족은 발목을 가늘게 제작했고 발도 사람의 그것과 유사해서 운동화를 신고 긴 바지를 입으면 전혀 의족처럼 보이지 않는다. 의족에 내장된 센서들은 ‘정상인’의 걸음걸이를 모사할 수 있도록 돕는다. 날렵한 형태의 칼날형 의족을 드러내고 달리는 사이보그들은 올림픽 트랙 위에만 있는 것일까.

인공심장박동기에서 임플란트까지

사이보그들은 분명 이곳에 있다. 이미 신체와 결합하기 시작한 기계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면 사이보그가 아직 이곳에 없는 존재라는 말은 정말이지 무색하다. 인공심장박동기, 인공와우, 합금 인공관절, 인공판막, 그리고 임플란트라는 단어를 누구에게나 익숙하게 만든 인공치아까지. 이미 기계와 결합된 수많은 사이보그들이 이 사회에서 살아간다. 그 많은 사이보그들은 숨겨져 있고 눈에 띄지 않는다. 사회는 사이보그들이 우리와 다른 모습을 할 것을 기대하지 않으며, 사이보그들의 기계는 정상성을 모방하는 범위 내에서만 기꺼이 받아들여진다. 사이보그들이 존재하지만 가시화되지 않은 현상은, 장애를 드러내는 순간 차별과 혐오의 낙인을 찍는 사회적 억압과도 맞닿아 있다.

이렇게 숨겨지는 사이보그를 드러내기 위한 방법으로 보조기기에 ‘쿨한’ 이미지를 덧입히는 경우도 있다. 언뜻 액세서리처럼 보이는 패셔너블한 보청기를 전시하거나, 세련된 모델이 그 자신만큼이나 세련된 모양의 인조 다리를 드러내고 화보를 찍거나 하는 식이다. 지금과 같은 과도기적인 상황에서 유용한 방법일 수도 있겠다. 반면 ‘사이보그가 꼭 패션이 되어야 할까?’라는 생각도 든다. 그 또한 아름다움의 위계를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상을 살아야 하는 사이보그들이 카메라 앞에 서는 모델들처럼 늘 그럴듯한 모습을 유지할 수도 없다.

힙하고 트렌디하고 쿨한 사이보그가 아니라, 그냥 투박한 존재들이 자신의 결함을 그대로 드러내며 살아가는 게 가능할까? 어떤 표준이 존재하지 않는, 서로의 몸과 몸 사이에 위계가 없는 세계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유토피아를 향해 가더라도 최후에나 가능한 모습일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투박한 사이보그들의 세계를 꿈꾸어본다. 그곳으로 가는 길을 함께 찾아보고 싶다.

만약 그런 세계를 상상한다면, 그것은 지금 이곳에 사이보그가 존재함을 선언하고 또 발견하는 일에서 출발하리라고 생각한다. 그 선언이 완전히 이룩된 사회에서 우리는 각자의 다름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볼 것이다. 그런 세계에서 우리는 더 이상 표준형 인간을 모방하지 않을 것이다.

기자명 김초엽 (SF 작가·〈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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