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의 비준 절차에 들어갔다. ILO는 노동·기업·정부 대표 3자가 참여해 노동과 고용 문제를 전문으로 다루는 유엔 산하 기구다. 187개국이 가입해 있다. ILO는 ‘결사의 자유’ ‘강제노동 금지’ ‘아동노동 금지’ ‘차별 금지’ 등 4개 부문에서 각 2개씩 모두 8개 협약을 ‘핵심협약’으로 규정한다. 또한 모든 회원국에게 핵심협약의 비준을 사실상 의무화하고 있다.

한국은 1991년 152번째로 ILO에 가입했지만, 핵심협약 가운데 ‘결사의 자유’(제87·98호), ‘강제노동 금지’(제29·105호) 관련 4개 협약은 비준하지 않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이 비준하지 않은 4개 핵심협약을 모두 비준하겠다고 대선에서 공약했다. 국정 과제에도 포함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집권 3년차가 되도록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지 못했다.

‘국가 간 약속’이라 할 수 있는 조약을 비준하고 나면, 그 조약의 내용을 국내에서도 시행해야 한다. 그러나 ILO 핵심협약과 한국의 법률이 충돌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문재인 정부는 ILO 핵심협약에 맞춰 국내법을 먼저 정비한 뒤 비준을 추진하려 했다(선입법 후비준).
 

ⓒ연합뉴스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5월22일 국제노동기구(ILO) 협약 비준과 관련해 설명하고 있다.

비준 자체는 물론 국내법 개정 역시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래서 지난해 7월 노사정이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 산하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노사관계위)에 이 문제를 넘겼다. 노동과 자본이 모두 참여하는 경사노위에서 합의가 이뤄지면, 때로 국회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위한 싸움’을 피할 수 있을 터였다. 경사노위는 지난 5월20일, ILO 핵심협약에 대한 논의를 마쳤다. 다만 기대했던 합의안은 노사 간 의견이 너무 달라서 나오지 못했다.

결국 이틀 뒤인 5월22일, 문재인 정부는 ‘선입법 후비준’ 방침을 바꿔, 일단 비준 절차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비준동의안’과 ‘국내법 개정안’을 함께 오는 9월 정기국회에 낸다는 의미다. 이는 정부가 노동계의 편을 들어준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노동계는 정부가 비준 절차를 법 개정보다 먼저, 또는 동시에 진행하라고 주장해왔다(선비준 후입법). 비준된 ILO 협약은 그 시점에서 1년 뒤부터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기 때문이다. 이 사실 자체가 국내법의 개정을 강제하는 일종의 압박으로 작용해서, 핵심협약 내용을 충실히 반영해 노동권을 신장하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할 수 있다고 노동계는 본 것이다.

하지만 실상을 따져보면, 문재인 정부가 노동계의 손을 들어줬다고 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9월에 낼 국내법 개정안은, 노동계라기보다는 경사노위 산하 노사관계위의 공익위원들(노동계뿐 아니라 경영계와 정부 추천 위원 포함)의 권고안을 비중 있게 반영한 내용일 것으로 보인다. 협약 비준에 필요한 최소한의 법 개정을 권고한 안이지만, 노동계는 이에 비판적이다.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 ‘파업 시 직장점거 제한’ 등 핵심협약과 무관한 기업 측 요구 사항들이 일부 포함되어 있고, 국내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유로 핵심협약에 못 미치는 내용(기업별 노조의 간부 자격 제한이나 근로시간 면제제도 관련)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노동계의 요구인 ‘선비준’이 최근의 국회 상황에서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이 정부 측 시각이다. 비준동의안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논의하는데, 윤상현 자유한국당 의원이 위원장을 맡고 있다. 위원 22명 중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0명이다. 법 개정안은 환경노동위원회에서 논의하는데 역시 김학용 자유한국당 의원이 위원장이다. 김학용 환노위원장은 ILO 핵심협약 비준이 “시기상조”라는 입장문을 냈다. 여당 관계자는 “환노위에서 법 개정이 정리되지 않는 이상 외교통일위원회에서 비준동의안만 먼저 처리해줄 가능성은 거의 없다”라고 말했다.
 

ⓒ연합뉴스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운데)는 비준 추진에 대해 “입법부를 자판기로 여긴다”라고 말했다.

FTA, 노동권의 수호자가 되다

문재인 정부가 굳이 현 시점에서 비준 절차를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더 미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한국 정부는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당시부터 수차례에 걸쳐 핵심협약 비준을 약속해왔다. 압박성 권고도 여러 번 받았다. 최근엔 국제사회의 압박 수준이 ‘비준하지 않으면 통상 차원에서 불이익을 주겠다’는 식으로 강화되었다. 2011년 7월1일 발효한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르면, “양 당사자(한국과 EU)는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중략)을 비준하기 위해 계속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을 할 것이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회원국이 핵심협약을 모두 비준(2007년)한 EU는 한국 정부가 FTA 발효 7년이 지나도록 비준을 이행하지 않자, 지난해 12월 ‘분쟁 해결 절차’를 공식 개시했다.

그런데 ILO 핵심협약은 노동권 보장에 관한 협약이다. 자유무역을 목적으로 하는 FTA가 어떻게 노동권의 수호자가 되었을까? 이승욱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자유무역협정은 공정한 경쟁을 하라는 의미다. 만약 두 나라 중 한 나라가 노동권을 보장하지 않음으로써 인건비를 절감한다면 불공정 경쟁이 된다. 1996년 무역과 노동의 연계를 ILO가 책임지기로 국제사회가 합의한 이후, FTA에서 ILO 문서에 근거한 노동권 보장이 강조되고 있는 이유다. 지금까지 FTA 노동 조항을 위반한 나라는 한 곳도 없는데, 만약 이번에 전문가 패널에서 한국이 한·EU FTA 노동 조항을 위반했다고 인정할 경우 한국은 세계 최초의 FTA 노동 조항 위반 국가가 된다.”

그러나 경영계는 ‘ILO 핵심협약으로 인해 통상 부문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를 “근거가 미약한 과장된 공포”라고 몰아붙인다. 한·EU FTA 규범에 따르면, 설사 한국이 관련 노동 조항을 위반했다고 하더라도 ‘관세 혜택 중단’ ‘배상금 부과’ 같은 제재를 받게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EU가 한국의 노동 조항 위반을 그냥 넘길 가능성은 낮다. 국제법에 위반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여러 불이익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이승욱 교수는 “EU는 일본 등과도 FTA를 체결하고 있다. 선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EU는 사용 가능한 모든 정책 수단을 동원해 ‘상상력이 풍부한 제재(어떤 형태가 될지 모른다는 의미)’를 한국에 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뿐만 아니라 한·EU FTA 노동 조항 위반이 인정되면, 역시 노동 조항이 있는 한·미 FTA, 한·캐나다 FTA의 상대국(미국과 캐나다)이 동일한 문제 제기를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더욱이 한·미, 한·캐나다 FTA에서는 규범을 위반한 나라가 관세 등에서 구속력 있는 무역제재를 받을 수 있다.

핵심협약을 비준하려면 상당수의 국내법을 바꿔야 한다. 예컨대 ILO의 ‘강제노동 금지’ 협약 가운데 29호를 비준하려면 ‘군 대체복무 제도(병역법상 보충역 제도)’의 일부를 바꿀 필요가 있다. 이 29호 협약은 ‘순수한 군사적 성격의 복무’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복무요원(옛 공익근무요원), 산업기능요원, 예술체육요원, 공익법무관 등 ‘순수한 군사적 노동(군복무)’ 이외의 다른 노동을 ‘제공해야 하는(=강제성이 있는)’ 대체복무는 ‘강제노동’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는 것이다. ILO 전문가 위원회는 이집트와 터키가 징집병 중 군대 필요 인원을 초과하는 인력을 공·사기업에 배치한 사례에 대해 29호 협약 위반으로 판단한 바 있다(김근주, 〈강제노동에 관한 핵심협약 비준 논의의 쟁점〉).

 

 

 

ⓒ연합뉴스전교조가 5월29일 법외노조 취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보충역 제도가 29호 협약에 전면적으로 위배되지는 않는다고 판단한다. 설사 ‘군복무로 이뤄지는 비군사적 노동’이라 하더라도 ILO가 반드시 강제노동으로 해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군복무 대신 ‘개인적으로 선택한’ 노동이라면 ‘강제받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식이다(개인에게 선택권이 있다). 보충역 중 전문연구요원, 예술체육요원, 공익법무관 등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고 정부는 주장한다. 산업기능요원도 기업 신청이나 개인 요청에 따라 병역 지정업체인 기업에 근무하는 형태여서 협약 위반은 아니라고 정부는 본다. 단, 사회복무요원의 경우 복무에 대한 개인 선택권이 전혀 부여되지 않기 때문에, 현역 복무 선택권을 부여하는 등 협약 취지에 맞게 제도를 개선한다는 방침이다. 물론 개선한 제도가 협약에 부합할지는 비준 뒤 ILO 관련 위원회의 공식 판단을 받아봐야 한다.

정부는 강제노동에 관한 또 다른 핵심협약(105호)은 장기 과제로 돌렸다. 105호 협약은 정치적 견해를 갖거나 표현했다는 이유로, 또는 파업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노역을 수반한 징역형에 처해지면 강제노동으로 본다. 그런데 한국의 국가보안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등 다수 법이 정치·사상범이나 파업 참가자 등에게 징역형을 부과한다. 정부는 징역형을 금고형(노역은 하지 않는 형벌)으로 바꾸는 안을 검토했으나 형벌체계 전체와 관련되어 있고, 국보법 등 분단 상황도 맞물려 있어서 일단 제외했다.

전교조 자동 합법화는 아니야

한편 결사의 자유 관련 2개 협약(87· 98호)을 비준하면 현재 법외노조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합법화가 가능해질 전망이다. 전교조는 해고자 9명을 조합원으로 두었다는 이유로 2013년 고용노동부로부터 ‘노조 아님’ 통보를 받아 현재 법외노조 상태다. 87호 협약에 따르면, “노동자와 사용자는 어떠한 차별도 없이 사전 인가를 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해 단체를 설립하고, 그 단체의 규약에 따를 것만을 조건으로 가입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정부가 조합원 자격을 문제 삼아 ‘노조 아님’ 통보를 할 수 있는 노조법 시행령도, 현직 교원만을 조합원으로 둘 수 있도록 한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교원노조법)도 87호 협약에 정면으로 위반된다.

다만 핵심협약을 비준한다고 전교조 법외노조 상태가 자동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비준에 맞춰 교원노조법을 개정해 전교조가 조합원 자격을 스스로 정할 수 있게 되면(즉 해직자가 조합원으로 있어도 문제가 없게 되면), 설립신고를 다시 내는 방식으로 법적 지위를 회복할 수 있다. 전교조는 정부가 ‘노조 아님’ 통보를 직권으로 취소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정부는 직권 취소엔 난색을 표한다. 1·2심이 2013년의 정부 조치(전교조를 법외노조로 만든)를 정당하다고 판결했기 때문이다. 아직 대법원 판결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정부는 앞으로 협약 비준과 관련 법의 개정을 추진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겠다는 방침이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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