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통증이 갈수록 심해졌다. 시간이 좀 지나면 낫겠지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다. 결국 병원에 갔다. 어느 정도 인지도도 있고 지인이 물리치료사로 일하고 있는 2차 병원이라 그 친구 ‘실적’도 올려줄 겸 해서 방문했다.

의사는 어떻게 아픈지 물어본 뒤 침상에 누우라고 한 다음 이것저것 해보라고 했다. 손으로 여기저기를 만져보기도 하고 눌러보기도 했다. 엑스레이도 보면서 약간의 척추측만증과 디스크가 있고 협착도 의심된다고 했다. 협착은 엑스레이로는 알 수 없지만 지금 단계에서 굳이 MRI를 찍을 필요는 없다며 2주 정도 치료해보고 그래도 통증이 낫지 않으면 그때 MRI를 찍자고 했다.

문제는 그 사이에 벌어졌다.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나오는데 통증이 심해졌다. 의사 친구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니 MRI를 한번 찍는 게 좋겠다고 권했다. 평소에 그런 ‘과잉’ 진단을 별로 권하지 않는 친구라 두말 않고 찍기로 했다. 지인이 다니는 병원은 거리가 너무 멀어 통증을 안고 거기까지 가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다른 2차 병원을 찾았다.

ⓒ이우일

이 병원은 가자마자 문진 없이 엑스레이를 찍으라고 했다. 의사는 엑스레이를 보고 몇 가지를 물은 다음 바로 MRI를 찍자고 했다. 어차피 MRI를 찍기 위해 온 것이니 군말 없이 동의서에 사인했다. 초스피드로 MRI를 찍고 의사를 다시 만났다. 의사는 MRI 사진을 보면서 몇 가지를 설명했다. 신경차단주사를 일단 맞자고 했다. 얌전한 양처럼 순순히 시키는 대로 했다. 비록 그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매우 친절했다. 고압적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사실 그가 한 말은 거의 생각이 안 난다. 어지간한 의료 용어는 대충 알아듣는데도 말이다.

그 병원을 나오며 머리에 자연스럽게 〈요통 탐험가〉가 떠올랐다. 이 책은 다카노 히데유키라는 오지 탐험가가 갑작스럽게 찾아온 허리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현대의학에서부터 각양각색의 전통요법과 민간요법을 섭렵하며 허리통증이라는 ‘오지’를 탐험하며 쓴 기록이다. ‘오지’ 탐험이 그러하듯 예기치 못한 난감함과 이해 불가능한 현상을 유머감 넘치게 썼다. 허리 아픈 사람들이라면 99%의 공감을 표하며 읽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절은 허리통증과 관련해 왜 민간요법이 유독 많은지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민간요법을 시행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허리통증으로 고통받던 사람들인데 자신들이 치료하는 그 방법으로 ‘효험’을 본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치료법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의사들과 달리 민간요법의 ‘치료사’들은 환자의 몸을 만지고, 그 몸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비록 가짜라고 하더라도)를 만들어내고 환자에게 말을 건다.

환자 처지에서는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신의 몸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들에게 끌리지 않을 수 없다. 통증이 실제로 좋아지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설령 진척이 없는 경우라 하더라도 말이다. “아, 그런가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미세함을 놓치지 않고 그걸 손으로 감지해서 말로 표현하는데 매혹되지 않을 사람이 없다.

데이터의 시대에 민간요법이 유행하는 이유

반면 현대 의학은 데이터로 말한다. 저자의 선배이자 의사이기도 한 사람은 이 책에서 이렇게 표현한다. “요즘 의사들은 몸을 진찰하지 않아(111쪽).” 몸에 대한 진찰은 첨단 진단장비들이 한다. 그 첨단 장비들이 이 모든 것을 수치화해서 보여준다. 사실 의사 자신이 청진기를 대고 ‘진찰’하는 것보다 이처럼 데이터화하는 ‘진단’이 훨씬 더 과학적이며 내 몸의 상태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평가한다. 이는 부정할 수 없다.

의학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책에서 들고 있는 교토 대학의 예시처럼 연구자들도 그렇다. 교토 대학은 원래 원숭이 연구를 철저하게 현장 조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요즘은 젊은 연구자들이 밀림에 들어가지 않고 고릴라나 원숭이에게 발신기를 달고는 연구실 컴퓨터만 쳐다보고” 있다고 한다(112쪽). 아마  ‘무식하게’ 발로 걷고 뛰는 것보다 훨씬 더 자세하고 방대한 데이터를 모아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데이터가 이야기를 압도하는 시대다. 삶의 전 영역이 그렇다. 나와 함께 공부했던, 커피를 만드는 박진우씨는 커피 세계도 같다고 말을 했다. 커피를 마시러 온 손님을 대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커피에 대한 정보의 밀도로 손님을 압도하는 것이다. 뭐는 뭐고, 어떤 것은 어떻고 하면서 전문가가 아닌 다음에는 알 수 없는 정보로 상대의 말문을 막는다. 다른 하나의 길은 ‘이야기의 환대’라고 그는 말한다. 이야기가 정보와 달리 환대인 이유는 이야기 자체의 특성 때문이다.

이야기는 〈유아기와 역사〉의 역자인 조효원씨가 말하는 것처럼 나누고 보태는 행위다(250쪽). 나누기 위해서는 먼저 들어야 한다. 내가 방문한 첫 번째 의사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하면 그 말에 자기 말을 보태서 나에게 돌려준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내 몸과 말을 살피는 것이 포함된다. 압도가 상대의 말을 끊어버리는 것이라면, 환대는 상대가 계속해서 말을 나누고 보태며 이어가게 한다. 환대는 ‘친절함’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친절하기로는 두 번째 병원의 의사도 아주 친절했다.

다시 요통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다카노 히데유키는 이렇게 모든 것이 데이터로 전환되고 데이터가 모든 것을 의미하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민간요법이 갈수록 더 인기를 얻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말한다. 나 같은 구닥다리 아날로그 시대의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니라 디지털 세대들에게도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통증은 자신이 느끼는 자기 몸의 무게감, 즉 몸의 ‘물성’의 문제라고 여기기에 환자는 그것이 완벽하게 데이터로만 취급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진다.

이것은 대체의학에 매혹되는 이들의 반지성주의나 반과학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비록 뇌의 작용이라고 하더라도 통증과 함께 시작되는 몸의 물성을 이 ‘데이터 사이언스’가 지나치기 때문이다. 몸의 통증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자각하지 못하지만 어려운 일을 겪을 때 사람은 자기 운명의 ‘무게’를 느낀다.

정치도 그렇다. 지금 자기 삶의 무게에 눌려 있는 사람들에게 거시적 경제지표가 얼마나 좋은지, 그 수치를 가지고 백날 이야기해봐야 설득되지 않는다. 더 자세하고 밀도 있는 정보로 설득하려고 하지만 설득이 아니라 ‘압도’하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럴수록 불쾌감을 느끼고 거부할 것이다. 그리고 자기 삶의 물성을 존중해주고 말을 거는 이야기꾼에게 매혹될 것이다.

최악은, 그 이야기꾼이 사기꾼일 경우다. 이미 많이 알고 있지 않은가? 좋은 대체의학도 많지만 현대 의학을 무조건 불신하게 하며 몸과 마음을 망가뜨리는 사기꾼들이 범람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문재인 정부의 언어가, 친절하지만 정보의 밀도로 시민들을 압도하는 게 아니라 눈을 마주치고 시민들이 끊임없이 자기 이야기를 보탤 수 있는 환대하는 이야기이길 간절히 소망한다. 문 밖에 위험한 사기꾼들이 너무 많다.

기자명 엄기호 (문화 연구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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