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유행과 각종 건강 피해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뜻하지 않게 ‘역학(疫學)’이 널리 알려졌다. 덕분에 예전에는 역학을 전공했다고 하면 “그게 뭐 하는 거냐”라고 묻던 사람들이 이제는 “아, 역학조사?”라고 말한다. 명리학의 역학(易學)과 물리학의 역학(力學)에 크게 뒤졌던 대중적 인지도가 조금 높아졌다고 생각하면 전공자로서 내심 흐뭇하다.

그러나 역학연구나 역학조사와 관련된 보도에 가장 많이 따라붙는 단어는 ‘엉터리’ 혹은 ‘부실’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결과가 뒤집히는 건강 뉴스는 역학에 대한 불신을 부추기는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하루는 ‘○○가 건강에 이롭다’고 했다가 또 다른 날은 건강에 해로우니 적게 섭취해야 한다는 뉴스의 반복이다. “도대체 어쩌라는 거냐”라는 댓글이 달릴 만도 하다. 그럼에도 역학조사와 역학연구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크다. 노동자의 직업병, 소비 상품이나 지역 환경오염의 건강 피해가 의심되는 상황에 직면하면 정부는 대개 ‘역학조사 시행 예정’ 혹은 ‘역학연구가 아직 진행 중’이라고 답변한다. 때로는 피해 당사자들이 진상 규명을 위한 역학연구를 먼저 요구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연구 결과가 나오면 도돌이표처럼 부실과 엉터리 논란이 시작된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시사IN 신선영메르스와 각종 건강 피해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역학’의 존재가 널리 알려졌다. 아래는 2015년 메르스 확산 당시 한 병원 모습.
역학은 어떤 식으로 원인을 규명하거나 연관성을 찾아내는가? 역학연구 설계의 황금률이라고 하는 임상시험 과정을 살펴보자. 예컨대 고혈압 신약이 기존 약보다 더 효과적인지 평가하려면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우선 일정한 조건에 해당하는 고혈압 환자들을 무작위로 신약 치료군과 대조군으로 할당한다. ‘무작위’ 할당이 중요한 이유는 더 건강하거나 나이가 젊거나 투약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 신약 치료군에 더 많이 배정되거나 더 적게 배정되면 신약의 효과가 실제보다 과대 혹은 과소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작위 할당은 기본 건강 상태, 나이, 사회적 배경 등이 두 군 사이에 고르게 분포하도록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역학이 밝힐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이렇게 치료군과 대조군이 확정되면 각각의 집단에 신약과 기존 약을 일정 기간 투여한 후, 두 집단 사이에 혈압 강하 효과를 비교한다. 이 과정에서도 약을 처방하는 의사나 약을 투여받는 환자 모두 자신들이 어떤 약을 사용하는지 모르도록 한다. 이를 ‘눈가림법’이라고 한다. 그래야 환자의 치료 경과에 영향을 줄 다른 요인들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의사가 신약의 효과를 기대하면서 환자를 좀 더 꼼꼼하게 진료한다든가, 환자가 자신이 신약 투여군이 아님을 알고 실망하여 연구 참여를 그만두거나 몰래 다른 조치를 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임상시험은 연구 시작 전 효과 입증에 필요한 표본의 숫자를 미리 계산하고 이 숫자만큼 환자를 모집한다. 표본 숫자가 늘어나면 임상적으로는 별 의미 없는 작은 차이도 ‘통계적으로 유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연구 과정은 연구 계획대로 사전에 상세히 작성된 프로토콜에 따라 이루어진다. 대상자 모집부터 무작위 할당의 규칙, 투약 방법, 자료 수집 절차, 최종 통계분석 방법까지 모두 이를 따라야 한다. 비록 동물실험처럼 완벽하게 통제된 상황은 아니지만, 연관성을 입증하기에 매우 타당한 접근법이다.

ⓒ서울대병원 임상시험센터 제공한 대학병원의 임상시험센터에서 임상시험을 실시하고 있다.

현실에서는 이 모든 엄격한 절차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담배가 폐암을 일으키는지 확인하기 위해 건강한 사람들을 무작위로 나누어 한쪽에는 30년 동안 담배를 피우게 하고 다른 한쪽에는 담배 연기 근처에도 못 가게 하면서 그 결과를 비교할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윤리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유해물질을 배출하는 공장이 주변 주민들에게 암을 일으키는지, 반도체 생산 노동자들의 백혈병 위험이 높아지는지 알기 위해 이들을 무작위로 위험 요인에 노출시키고 수십 년간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이미 수집해놓은 자료, 연구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수집해둔 자료들을 이용해서 마치 임상시험 같은 상황을 ‘설계’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여러 문제점이 생겨난다.

우선 비교 집단을 무작위로 할당할 수 없다. 그래서 비교 가능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흔히 직업성 암 발생이 늘어났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해당 사업장이나 산업 종사자의 암 등록, 사망 통계자료를 이용해 사례 수를 확인하고, 인사 자료나 고용보험 자료를 이용하여 분모를 확정한다. 전체 국민의 성별, 연령별 암 발생률이나 사망률을 이용해 연구 대상 노동자 집단의 분모에 적용하여 예상되는 사례 수, 즉 ‘기댓값’을 산출한다. 이렇게 구한 기댓값과 실제 노동자들 사이에 발생한 암이나 사망 사례 수를 비교하여 표준화발생비 혹은 표준화사망비를 계산한다.

ⓒ삼선전자 제공취업자들은 전체 인구보다 건강한 경향이 있어 반도체 산업 종사자의 암 발생률이 낮게 나온다.

만일 표준화사망비가 150이라고 하면, 전체 국민과 비교했을 때 특정 산업 노동자들의 사망률이 150%, 즉 1.5배 높다는 뜻이고, 100이면 둘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예컨대 반도체 제조가 실제로 위험하다면 암의 표준화발생비나 사망비는 100을 훌쩍 넘겨서 나타나야 한다.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대개 취업자들은 전체 인구보다 건강한 경향이 있다. 건강이 뒷받침되어야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위험한 일자리 같은데 막상 분석해보면 오히려 전 국민에 비해 사망률이나 암 발생률이 낮은 것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를 ‘건강근로자 효과’라고 한다.

아래 〈표〉에서처럼 반도체 산업 종사자에 대한 국제 역학연구에서 표준화사망비는 대부분 100에 미치지 못한다. 한국 남성 노동자는 그 값이 25에 불과하다. 전체 국민과 비교해 사망 수준이 4분의 1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본 건강 수준이 월등하게 좋다면 어지간히 위험이 높아지지 않는 이상 눈에 띄기 어렵다. 게다가 반도체 산업 안에도 생산직과 사무직이 있고, 생산직 안에도 클린룸에 출입하며 화학물질에 더 많이 노출되는 이들과 클린룸 작업을 하지 않는 이들이 있고, 또 같은 클린룸 근무라도 오래 근무하며 더 많이 노출된 이들과 상대적으로 짧게 근무한 이들이 있다. 이들을 모두 ‘반도체 종사자’로 뭉뚱그리고 전체 국민과 비교해버리면 위험의 효과는 희석되기 마련이다.


그럼 내부 비교를 하면 되지 않을까? 생산직과 사무직, 클린룸 출입자와 비출입자, 장기와 단기 근무자 등으로 말이다. 좋은 생각이다. 문제는 직군, 업무, 사용물질, 근무기간에 대한 정보들이 처음부터 연구 목적으로 엄밀하게 측정되고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전 기록이 남아 있지 않거나, 직군 분류가 행정적 목적으로 달라지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업무 속성 자체가 바뀌기도 한다. 그나마 대기업 정규직은 좀 낫다. 중소기업의 경우에는 잦은 인수합병이나 폐업 때문에 기록이 소실되기도 하고, 비정규직이나 하청업체 직원처럼 근무기록 자체가 부실한 경우도 흔하다. 실제 연구에서는 유해요인 노출 수준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굉장한 도전이다. 이렇게 유해요인 노출 상태를 제대로 분류하지 못하면, 위험을 과소평가하는 방향으로 바이어스(편차)가 생겨날 가능성이 크다.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한 역학의 역사

표본 크기도 문제다. 예컨대 2008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에서 고용보험 자료를 통해 파악한 반도체 산업 종사자 숫자는 17만여 명이었지만 10년 동안 림프조혈기계 암으로 사망한 사람은 22명에 불과했다. 한 명 한 명의 희생은 비극이지만, 암같이 드물게 발생하는 질병의 위험을 추정하기에는 충분치 않은 숫자다. 남녀를 구분하고 소집단별로 위험을 확인하게 되면 통계 추정의 정밀도는 더욱 낮아져 ‘유의한’ 차이를 확인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지역 환경오염 사례의 경우에도, 피해를 호소하는 지역은 주민 숫자가 고작 수천명인 작은 마을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여기에서 무언가 의미 있는 차이를 발견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토록 제약이 많은데도 역학연구가 여전히 필요할까?

하나의 역학연구가 명쾌한 답을 줄 것이라는 기대도, ‘알고 보니 순 엉터리’라는 폄훼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앞서 살펴본 여러 제약에도 불구하고 역학은 건강 문제의 원인을 밝히는 데 여전히 유용하고, 때로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 우리가 현실에서 부딪히는 보건 문제들은 잘 설계된 임상시험이나 엄격하게 통제된 동물실험 연구를 통해 탐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연합뉴스2016년 12월23일부터 모든 담뱃갑에 흡연 폐해를 나타내는 경고 그림이 표기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역학은 여러 제약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결론을 통해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했다. 아직 세균이라는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기 전이던 1854년, 존 스노는 꼼꼼한 역학적 방법으로 런던의 콜레라 유행이 수돗물 오염 때문이라는 것을 밝혀내 인명 피해를 막았다. 담배 안의 발암물질을 구체적으로 찾아내기 훨씬 전, 흡연과 폐암의 연관성을 입증하여 담배를 규제하게 만든 것도 역학연구 덕분이었다. 오늘날 작업장의 수많은 유해요인을 규제할 수 있게 된 것도 마찬가지다.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연구가 발견해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점에 주의하며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토론한 결과이다.

이러한 불확실성 때문에 역학은 항상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담배 회사들은 담배의 유해성을 규명한 역학연구들을 ‘쓰레기 과학(junk science)’이라고 비판했다. 작업장 유해요인에 대한 규제 도입에서도 기업들은 컨설팅 회사를 고용하여 역학연구의 한계점을 비판하며 규제가 부당하다고 맞서왔다. 아직 위험이 보고된 사례가 없다는 주장, ‘확실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결론을 미뤄야 한다는 주장, 아니면 상충되는 연구 결과를 제시함으로써 대중을 혼돈에 빠뜨리는 것이야말로 반대 측의 흔한 수법이다.

세상에 완벽한 역학연구는 없다. 오지 않을 미래를 기다리며 중요한 결정을 미루기보다는 ‘정답’이 아니더라도 ‘가용한 최선’의 근거에 기대어 결정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연구 설계나 대상 집단의 차이 같은 여러 제한점이 있는데도 일관된 결과가 도출된다면 충분히 연관성을 의심해볼 가치가 있다. 예컨대 반도체 역학연구들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위험을 과소평가하는 방향으로 바이어스가 작동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연구들이 기댓값 이상의 비호지킨 림프종 사망률을 보고했다.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은’ 결과가 대부분이지만 이는 표본 크기가 작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통계적 유의성의 이분법에 매달리지 말자”

무엇보다 통계적 유의성에 집착하는 것 자체가 과학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최근 통계학자와 역학자를 포함한 전 세계 과학자 800여 명이 ‘제발 통계적 유의성의 이분법에 매달리지 말자’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을 만큼 이 문제는 학계의 고질병이기도 하다.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다는 것이 ‘연관성이 없다는 증거’는 결코 아니다. 통계적 유의성은 ‘모 아니면 도’의 이분법적 해석이 아니라 자료가 가설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불확실성의 ‘정도’가 얼마나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더구나 유념해야 할 것은 학술적으로 인과성을 규명하는 일과 사회보장 혹은 규제 기준을 마련하는 일은 별개의 영역이라는 점이다. 산재보험은 사회보장제도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개연성만 인정된다면 (이른바 ‘상당 인과관계’) 피해자를 보호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또한 학술적으로는 논쟁이 있다 하더라도, 비가역적 건강 피해의 가능성이 있다면 확실한 증거를 기다리기보다 사전 예방의 원칙에 따라 규제를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분명한 인과성과 기전을 탐구하는 것은 과학의 마땅한 소명이지만, 사회정책과 규제는 과학의 원칙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역학연구를 직접 수행하는 것은 전문가들이지만, 그 결과가 우리 모두의 건강과 삶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시민은 역학을 좀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역학연구에 내재한 불확실성의 속성, 연구 결과를 둘러싼 이해 당사자의 정치, 건강과 안녕에 대한 사회적 혹은 기술적 보호 장치의 역할을 이해해야 이 도구를 활용하여 좀 더 나은 사회적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은 스스로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기자명 김명희 (시민건강연구소 상임연구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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