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만원짜리 대형 휠체어에 처음 앉은 날은 열다섯 살 가을이었다. 작은 몸에 휠체어가 지나치게 컸다. 푹 들어간 몸으로 양팔을 치켜올려 팔꿈치를 직각으로 만든 후, 간신히 바퀴에 손끝을 댈 수 있었다. 첫 휠체어는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제품으로 무거운 철제 프레임, 낡고 두꺼운 가죽으로 이뤄진 등받이와 시트,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한 울퉁불퉁한 디자인의 플라스틱 핸드림(휠체어 바퀴를 따라 부착되어 손으로 바퀴를 움직이게 하는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애초부터 직립보행을 하던 사람들이 처음 휠체어에 앉으면, 그들은 태어나서 처음 누군가의 허리나 가슴에 시선을 두고 공공장소를 거닐어야 한다. 나는 잠깐의 기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바닥을 기어서 다녔으므로 휠체어에는 ‘올라’앉았다.

시점이 그만큼 높아졌다. 손가락과 손목을 사용해 간신히 핸드림을 잡고 바퀴를 굴렸지만, 일종의 도약감을 먼저 느꼈다. 다만 내가 살던 마을에 바퀴로 이동이 가능한 곳은 거의 없었다. 집 안에서 몇 번을 타보았고, 마당에 나가 하늘을 봤고 강아지를 만졌다. 적어도 그만큼 더 많이 이동할 수 있게 된 셈이고, 더 높아져서 기뻤다. 그러나 휠체어를 구입하고 시승해본 날 우리 집에 와 있던 고모가 눈물을 흘렸다. 나는 더 커졌는데 고모는 왜 울었을까? 사람은 기기와 ‘결합’해서 늘 확장되지는 않는다. 더 작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한성원 그림

몇 개월이 지나 특수학교에 입학하면서 휠체어를 가지고 갔다. 요령이 생겨 바닥에 두꺼운 책을 몇 권 깔고, 신발을 느슨하게 신어 덩치 큰 휠체어 위로 몸을 뽑아 올렸다(나는 팔이 길다. 긴팔원숭이와 형태학적으로 가장 유사하다). 어깨 높이가 올라가자 비로소 양팔이 핸드림에 적절한 각도로 닿았다. 체중 대비 팔 근력이 좋은 나는 그때부터 바람을 가르듯 계단도 턱도 없는 재활학교 공간을 질주했다. 높아지고 가벼워진 기분이란, ‘움직이는 생물(動物)’의 경험이라니!

새로운 배움의 기회와 친구들, 자유로운 이동으로 신이 났다. 그렇게 학교에 입학하고 며칠이 지났을 때, 출입구 쪽에 설치된 전신 거울 앞을 지나며 내 모습을 마주하고 말았다. 큰 스틸 휠체어 위에 앉은 작은 신체, 길고 튼튼한 팔, 10대 사춘기 남자애가 거기 있었다. “너는 도대체 누구니?” 거울 속 존재가 물었다. 나도 그 존재에게 질문했다. “너는… 사람이냐?”

SF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인간형 로봇(휴머노이드)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질문하며 이야기가 절정으로 치닫는다. 로봇들은 자신의 겉모습, 생각하는 방식, 기본적 권리의 유무, 죽거나 살아남는 법이 인간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느낄 때 정체성 물음에 직면한다. 미국 드라마 〈웨스트월드(Westworld)〉의 휴머노이드 로봇 돌로레스는 인간들이 만든 폐쇄된 세계 안에서 프로그래밍을 따라 폭력과 성적 착취를 반복해 겪는다. 어느 날 자기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존재의 목소리를 듣게 되고, 그 목소리를 찾아 나선다. 첫 번째 시즌 마지막 회에 이르면 그녀가 마주한 ‘질문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음이 밝혀지고, 그 순간 돌로레스는 인간을 향해 혁명을 시작하는 각성된 자의식의 소유자가 된다.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답변은 그 내용보다는, 질문을 제기하고 답하는 존재가 자신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물음을 제기하고 그 물음에 대응하는 존재가 부모, 로봇공학자, 신 등 ‘창조주’가 아니라 스스로일 때 비로소 우리는 고유한 자의식의 단계로 돌입하고 거기서 개인의 정체성이 출현한다.

장애가 사라진다는 것의 의미

우리 시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해명은 종교나 국가가 아닌 주로 과학이 담당한다. 과학 지식은, 거울 속에서 휠체어 위에 앉아 ‘긴팔원숭이’ 같은 모습을 한 나에게 친절한 설명을 제공한다. 생물학적으로 나는 8000년 전 한반도에 정착한 호모사피엔스의 유전적 후손임이 틀림없고(사실 확인해보지 않아서 모른다), 특정한 유전 질환 때문에 몸통과 다리에 비해 길고 튼튼한 팔을 가지게 된 것이며, 더 좋은 의료적 지원과 보조공학 기기를 이용하면 ‘보통의 몸’을 가진 사람들과 유사한 삶을 살 수도 있음을 알려준다. 과학의 설명은 내 몸을 신의 저주나 은총(“신께서는 네 몸을 통해 이루실 역사가 있는 거란다”)으로 보는 시각보다 덜 게으르고, 더 희망적인 것 같다.

그러나 과학은, 장애에 대한 정체성 물음을 “장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네가 인간이며, 조만간 그 장애는 극복될 것이므로 너는 더 ‘온전한’ 인간 공동체에 포함될 수 있다고 전제함으로써 장애 그 자체의 의미를 해명하지는 않는다. 당연하다. 장애를 가진 몸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개조하는 일은 과학이 해낼 수 있지만, 장애를 가진 몸 그 자체의 정체성에 대한 해명은 그 몸을 가진 내가 해야 한다.

20세기 후반 DNA 게놈 지도가 완성되어갈 무렵, 그래서 인간에 대한 정체성을 더 이상 종교나 정치가 아니라 (생명)과학이 답변하게 된 바로 그 시대에, 역설적으로 장애라는 인간의 경험이 병리학에서 존재론으로 이동했다. 즉 장애가 병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한 양상이자 차이의 문제로 생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저널리스트 앤드루 솔로몬은 “지금 이 시점은 예컨대 여자 주인공이 소파에 누워 숨을 거두려는 순간에 비로소 남자 주인공이 그녀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 그랜드 오페라의 마지막 장면과 비슷하다”라고 비유했다. 커다란 기계 위에 앉은 유인원의 모습을 한 내 존재에 대해 스스로 답변하고 받아들이면서 고유한 자의식을 발전시키는 바로 이 순간, 과학기술의 발전은 최첨단 휠체어나 로봇 외골격을 부착한 내가 계단을 오르고, 내 장애의 유전 가능성은 철저히 제거하는 시대로 가고 있다.

장애가 사라진다면 이는 좋은 소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바로 이 복잡성이 이 연재 글이 탐구해야 할 주제다. 나는 SF 작가 김초엽이라는 또 다른 ‘거울’을 통해 묻고 답하면서, 독자들과 함께 커다란 휠체어 위에 앉은 긴팔원숭이 같은 존재가 왜 인간인지, 혹은 왜 꼭 인간이어야 하는지, 인간이 아니면 좀 어떤지 묻고자 한다.

기자명 김원영 (변호사·〈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