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나 드라큘라 또는 유령은 어느 시대,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흥미로운 소재일 수밖에 없다. 특히 현실이 괴롭거나 암울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이 책은 러시아에서 이민 온,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한 소녀 아냐의 성장기이다. 우리가 마주해야 할 그리고 넘어서야 할 어둠을 유령이라는 소재를 끌어와 흥미롭고 재미있게 풀어간다.

부유한 미국 아이들이 가득한 사립학교에 다니는 아냐는 못생겼고 뚱뚱하다. 게다가 러시아 이민자로서 이런 사립학교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처음 이민 왔던 어린 시절, 뚱뚱한 몸과 러시아식 억양 때문에 괴롭힘을 당했다. 아냐는 그들 사이에서 늘 주눅이 든 채 움츠러들어 있다. 가능하면 평범한 미국 아이들 틈에서 눈에 띄지 않고 무난하게 지내려고 애쓴다.

그러던 어느 날 딴생각을 하며 걷다가 메마른 우물 구멍에 빠지는 아냐. 한없이 추락한 저 깊은 우물에서 아냐가 마주한 것은 해골. 잠시 후 나타난 그 해골의 유령! 무섭기만 한 유령 에밀리는 아냐와 어느새 친구가 된다. 에밀리는 아냐를 쫓아다나며 많은 도움을 준다. 아냐는 에밀리한테 100여 년 전에 살해당한 이야기를 듣는다. 아냐는 에밀리에게서 도움만 받을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고 싶어 100여 년 전 사건을 해결해보기로 결심한다.

유령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또 다른 나

우물은 여러 문학작품이나 영화 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우리에게 일용할 물, 생명의 필수 요소인 물을 제공하는 수원(水源)이기도 한데, 작품에서는 원죄의 상징이나 우리가 감추고 싶은 내 안의 어둠을 나타내는 장치로 종종 쓰인다. 더 이상 ‘수원’ 기능을 하지 않는 우물터는 우물 안에 빠져 죽거나, 시체를 묻고 ‘덮어버리는’ 흉흉한 이야기로 인해 ‘전설의 고향’으로 변모한다. 책 〈아냐의 유령〉에서도 작가 베라 브로스골은 우물에서 작은 유령을 탄생시키며 아냐의 삶을 다시 써내려 간다.

주인공 아냐가 겪은 차별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살다가 다섯 살에 미국으로 이민 온 작가의 고백인 듯도 하다.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아냐는 유령 에밀리를 만나고부터 성적이 오르는가 하면 또래들과 비슷해지는 듯 느끼며 유령의 존재가 고맙기 짝이 없다. 아냐와 친구가 된 에밀리는 생물 시험 정답도 알려주고, 아냐가 짝사랑하는 남학생 숀과 파티에 함께 가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아냐는 에밀리 살해 사건의 전말을 알아내려 도서관에 갔다가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되고, 에밀리로부터 벗어나려 애쓴다. 그럴수록 에밀리는 아냐를 궁지로 몰아가고 위협하기에 이른다. 아냐는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잘못임을 뼈저리게 깨닫고 자신과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유령과 맞선다.

책에서 ‘유령’은 단순한 귀신의 의미가 아니다. 유령은, 아냐가 그랬듯 우리가 지닌 무기력함·열등감·시기심 따위 내 안의 약한 모습으로, 우리가 극복해야 할 또 다른 나는 아니었을까. 작가는 경쾌한 톤을 잃지 않고 이야기를 견인한다. 결국 분신과도 같았던 친구 유령을 퇴치한 아냐는 남의 외모, 남의 물건, 남의 애인을 탐내던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는 이렇게 말한다. “겉만 그렇지, 속은 또 다를 수” 있다고, 그 사람들의 내면 역시 번드르르한 겉모습과는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고.

〈아냐의 유령〉 베라 브로스골 지음, 원지인 옮김, 에프(F) 펴냄

기자명 김문영 (이숲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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