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스포츠 인권’ 문제에 관여하게 된 것은 10년 전쯤부터다. 2008년 2월 초,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상임위원으로 일을 막 시작하려는 참에 방영된 한 방송사의 스포츠 성폭력 관련 탐사보도가 계기가 되었다.

 

“선수는 자기가 부리는 종이야. 육체적인 종이 될 수도 있고…. 선수 장악을 위해 여자니까 (성관계를) 가져야 날 따라오고….” 너무나 충격적인 내용. 그런데 나에게 더 놀랍게 다가온 사실은 또 있었다. 국민에게 사이다 같은 역할을 하는 스포츠계가 인권 사각지대였다는 점이다.

인권위는 당장 체육계를 비롯해 폭력·성폭력 문제 전문가들과 대책반을 꾸렸다. 필자도 그 한가운데 있었는데 다들 열정적으로 일했다. 2008년은 ‘스포츠 인권’과 씨름한 한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권위에 신고센터를 열어 제보된 사건을 조사하고 전반적인 실태 조사도 했다. 그 결과는 폭력 및 성폭력, 학습권 침해가 얼마나 체육계에 만연한 병폐인지 여실히 보여줬다.

대한체육회의 눈 가리고 아웅 식 인권교육

선수와 지도자, 학부모와 관계자까지 포괄하는 대대적인 인권교육도 실시했다. 심각한 학습권 침해와 폭력·성폭력 같은 인권유린이 용인되는 그 밑바닥에는 메달 지상주의와 엘리트 체육정책이 자리 잡고 있음을 간파하고 생활체육으로의 전환 같은 좀 더 근원적이고 포괄적인 대책이 이행되지 않고서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음을 지적하고 권고했다.

그로부터 만 11년이 지난 2019년 새해 벽두. 쇼트트랙 심석희 국가대표 선수가 조재범 전 대표팀 코치로부터 상습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이어 빙상계의 또 다른 선수들이 지도자들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밝혔다. 슬프고도 허탈하다. 참담할 정도로 반복되는 스포츠계의 성폭력 문제를 보면서 지난 10년간 우리는 무엇을 했던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심석희 선수의 폭로 직후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가 긴급 발표한 대책은 새삼스러울 게 없다. 기존 대책에다 가해자 엄벌과 예방 기구 설치를 추가한 정도다. 문제는 대책이 없어서 스포츠 성폭력이 반복되고 피해자가 방치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누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연합뉴스이기흥 대한체육회 회장이 15일 오전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대한체육회 제22차 이사회에서 체육계 폭력·성폭력 사태에 대한 쇄신안을 발표하며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2019.1.15

 

 

 

대한체육회가 지난 10년간 운영해온 스포츠인권센터나 인권교육은 한마디로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시늉만 냈다고 할까. 피해자는 많지만 대한체육회에 신고하지 않는다. 대대적인 개편이 요구되는 사항이다. 문체부가 내놓은 정책 대부분은 대한체육회를 비롯한 체육계에 맡겨서는 손톱만큼의 진전도 가져오기 어렵다. 근원적인 문제는 또 있다. 문체부의 긴급 대책이 임시방편은 될지언정 스포츠계 성폭력을 뿌리 뽑는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싹은 자르되 거대한 뿌리는 그대로 남겨두는 격이다. 스포츠계 성폭력은 체육계에 만연한 권위주의적 복종 문화와 성차별이 중첩된 데서 기인한다. 엘리트 스포츠 체제하에서 지도자의 권력은 절대적이다.

가족과 유사한 강한 결속력을 특징으로 하는 스포츠 공동체의 폐쇄성은 피해자 보호나 문제의 해결보다 공동체의 명예나 기득권자의 이해관계를 더 우선으로 고려해왔다. 사건이 터졌을 때 이를 묵인하고 방조하거나, 심지어 가해자에게 넌지시 알려주어 무마시키고 2차 피해를 자초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대한체육회를 비롯한 시도 체육회와 가맹 단체 관계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해묵은 ‘침묵의 카르텔’은 체육계의 적폐이자 성폭력 등 스포츠 인권 문제의 본질적 요소다. 이 묵은 적폐를 청산하지 않는다면 체육계의 많은 문제는 풀리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피해자들의 신고를 격려하고 지원책을 강화해야 한다. 신체 접촉이 많은 운동의 특성이 있다 해도 훈련을 빙자한 성폭력은 단호히 근절되어야 한다. 인권의식과 인권기준 등의 교육을 강화하고, 피해자 치료와 치유, 2차 피해에 대한 철저한 예방 등이 보장되지 않고서는 신고율 증가를 기대하기 어렵다. 제2, 제3의 심석희 선수가 홀로 고통을 감내하며 숨죽이고 있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기자명 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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