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구마 파는 늙은이야…이제 영업을 2단지로 옮겨야지. 39살 최미자 새댁도 이제 보는 게 끝이구먼…내년 봄에 노란 토끼 오기 전에 준비들 혀.” 이런 알 듯 말 듯한 글을 남기고 사라진 그의 이름은 ‘미네르바’. ‘지혜와 공예의 여신’을 뜻하는 미네르바(Minerva)는 물론  웹상 이름인 아이디다.

올 3월부터 인터넷 포털 다음 ‘아고라’에서 경제 논객으로 활동했던 그는 9월 들어 ‘인터넷 경제 대통령’으로 불릴 만큼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가히 ‘미네르바 신드롬’을 낳았다. 그가 최근 수개월간 리먼브러더스의 파산과 환율 급등을 예견하는 등 제도권 전문가들이 감히 하지 못했던 경제위기를 예측했기 때문이다.

 10월29일 살해 위협을 받았다며 최초 절필을 선언하고, 11월14일 ‘국가가 침묵을 명령해 경제 관련 글을 쓰지 않겠다’며 온라인에서 사라진 그가 다시 출몰한 것은 오프라인 〈신동아〉 12월호. “최악의 스태그플레이션 온다, 환투기 세력 ‘노란 토끼’의 공격이 시작됐다”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그는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켰다.

아고라에서 200여 편의 글을 쓸 때 ‘고구마 파는 늙은이’로 자신을 소개한 그가 신동아를 통해 밝힌 것은 증권사 경력과 외국 생활 경험이다. 나이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50대 남자’로 알려져 있다. 기고문이 나온 직후 미네르바의 동창이라고 주장한 ‘readme’라는 아이디의 누리꾼은 그를 K라고 부르며 명문학교 출신에다 CEO로 재임할 때 존경받았던, 대한민국 0.1%에 속하는 극상위층이라고 주장했다.

미네르바가 극상위층에 속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금융 등 경제 지식이 해박하고 경험이 풍부한 사람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인터넷이라는 익명의 공간에다 은유를 많이 사용한 것도 신비주의를 강화시켰다. 그는 ‘39살 최미자’, ‘맥도날드표 빨대’ ‘노란 토끼’ 같은 수수께끼 같은 표현을 즐겼다. 그가 새댁 이름으로 인용한 39살 최미자에 대해 증권 전문가들은 최미자는 ‘최고 미국 자본’의 줄임말이며 이것은 헤지펀드의 대표 격인 ‘퀀텀펀드’, 결국 조지 소로스를 지칭한다고 풀이했다. 퀀텀펀드가 1969년에 설립되었으니 회사 나이가 39세인 사실과 일치하는 추정이다. ‘맥도날드표 빨대’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헤지펀드의 공습을 경고하는 메시지라는 외환 딜러들의 풀이가 나온다. 현재 한국 시장은 헤지펀드들이 그가 ‘소주’로 은유한 한국 자본을 쪽쪽 빨아먹을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누리꾼은 물론 금융 전문가들이 가장 궁금해했던 ‘노란 토끼’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조지 소로스가 특히 타이와 홍콩 외환시장을 공략할 때 ‘노란 토끼’라는 은어를 사용했다는 주장이 증권가에서 나왔는데, 미네르바 역시 소로스를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환투기 세력’이라고 확인했다. “10년 전 외환위기 당시 환율을 끌어올렸던 바로 그 세력으로 외양은 미국 헤지펀드이지만, 그 배후에는 일본 엔캐리 자본이 버티고 있다. 그래서 노란 토끼다.” 엔캐리 트레이드는 0%대 금리 엔화 자금을 빌려 고수익이 기대되는 나라의 금융상품에 투자하는 것을 뜻한다.

한국 경제에 최악의 스태그플레이션 엄습?

최근 〈신동아〉에 투고한 글은 그가 지난 8개월여 썼던 글 200여 편의 집대성이자 최신판 성격을 띤다. 강도도 셌다. 코스피 지수가 500선으로 떨어지고 부동산 가격도 반토막이 나며 ‘노란 토끼’의 공격에 의해 한국은 연말 혹은 내년 3월을 못 버티고 일본 자본에 편입되는 파국을 맞이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격렬한 파문을 몰고 온 이런 주장에 대해 경제학자 5명에게 평가를 의뢰했다. 국내 은행의 한 고위 임원과 외국계 은행 중견 간부, 증권회사 애널리스트, 민간 연구소 연구위원, 진보 성향의 재야 학자인데 금융을 전공하거나 금융회사에 몸담은 이들이다. 이들은  미네르바에 대해 적대적이기는커녕 우호적이었지만 열렬 지지자들의 공격을 의식한 듯 익명을 요구했다.

 경제학자 5명은 예측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동의했다. 나름의 근거를 통해 경제 전체에 대한 큰 틀의 분석에도 공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이들은 미네르바가 논리를 전개하는 방향이 너무 극단적이라고 평가했다. 재야의 한 금융학자는 “주가와 부동산 값이 앞으로 가파르게 내리꽂힐 개연성은 충분하지만 실물경제 위기가 어떤 방향과 강도로 경제를 덮칠지 아직은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주가 500선, 부동산 반토막 언급은 무리가 있다”라고 평했다.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최악의 상황은 한국 등 모든 나라 정부가 속수무책으로 위기를 방치한다는 뜻인데 과연 그런가”라고 반문했다. 그가 각국 정부의 노력이나 국제 공조 흐름이라는 역동성을 간과했다는 지적이다.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과 함께 최근 미네르바로 지목되는 소동을 겪은 유시민 전 장관 말마따나 경제 예측에는 나름의 근거가 제시되지만,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특히 주가나 부동산 값 같은 가격 예측은 위험하다. 가격의 방향성이 중요할 뿐 숫자 그 자체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게 증시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노란 토끼에 대해서는 더욱 비판이 쏟아졌다. 민간 연구소의 한 연구위원은 “지난해부터 은행의 예대율이 100%를 넘어섰다. 은행들은 예금에서 대출을 충당하지 못해 CD나 은행채를 팔아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했다. 그런데 주요 매입 주체가 헤지펀드 같은 외국 자본이 아니라 국내 펀드로 알고 있다”라며 일본 자본의 공격 자체를 일축했다. 은행의 한 고위 임원도 “글로벌 펀드에는 몇 단계로 돈이 유입되므로 그 돈이 어떤 돈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따라서 설령 한국의 은행들이 발행한 CD나 은행채를 엔캐리 자본이 녹아 들어간 헤지펀드가 상당수 매입했다 해도 이것을 한국을 편입시키려는 일본 자본의 의도로 해석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정말 일본이 조직적으로 공격했다면 금융시장에 노무라 같은 일본계 자본의 흔적이 어떤 식으로든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정황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미네르바는 인터넷 포털 다음의 아고라에서 지난 3월부터 11월14일까지 200여 편의 글을 써온 대표적인 경제 논객이었다. 리먼 파산 등 몇 가지 예측이 적중하면서 미네르바 팬덤 현상을 불러왔다.
외국계 은행의 중견 간부도 “엔캐리나 ‘와타나베 여사(초저금리 엔화로 고수익 해외 금융상품에 투자하는 일본의 전업주부)’로 대표되는 일본계 자본이 글로벌 자본의 최대 공급처인 것은 맞지만, 한국에 대한 투자는 별로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재야의 한 금융학자는 “미네르바 주장처럼 엔캐리 자금이 한국 은행들의 CD를 헤지펀드라는 우회 경로로 대거 사들였다고 하더라도 일본이 한국을 망하게 해서 무슨 실리가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만약 미네르바의 모든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은행 CD는 원화로 발행한 것이므로 CD 상환 요구를 원화로 하면 된다. 설령 일시에 몰려 은행들이 상환 불능 사태에 처하더라도 이를 중앙은행이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런 사태가 현실화할 수 없다”라고 반응했다. 정부는 이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을까. 금융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엔캐리 자금 동향을 지켜보기는 하지만, 위협 요인은 별로 없다”라고 말했다.

결국 미네르바가 막판까지 그토록 강조한 한국 경제의 일본 편입이라는 ‘노란 토끼 침탈론’은 전문가 5명에 의해 거의 깡그리 부정된 것과 마찬가지다. 정도 차는 있지만 이들이 미네르바의 다른 주장에 대해 동의 혹은 가능성 있다고 본 것과 사뭇 다른 반응이다. 그렇다면 그의 주장은 ‘검은 백조(The Black Swan)’ 개념으로 봐야 하는 것일까.

월가에서 투자 분석가로 활동했던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가 지난해 펴낸 〈검은 백조〉에서 소개한 검은 백조는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 혹은 사건’ 또는 ‘전문가가 계산한 확률 밖에 존재하는 사건’을 뜻한다. 세계 경제나 주식시장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극한의 충격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이 전례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미네르바 주장처럼 우리가 생각할 때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라는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의 지적도 같은 맥락이다.

미네르바가 극단에 서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최근 들어 비관론이 자취를 감춘 것과 관련해 언로 차단을 경계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증권가 애널리스트 사이에서는 ‘정부가 우국·호국 리포트를 내놓으라고 압박한다’는 볼멘소리가 터져나오는 판이다. 그런 점에서 11월27일 진보 성향의 경제학자들이 대안적 정책을 내놓기 위해 만든 한국경제정책연구회의 창립 심포지엄에서 현직 증권사 임원의 언급은 ‘용감한’ 지적이라 할 만하다. 조홍래 한국투자증권 리서치본부 전무는 “정책 당국자와 시장 참여자가 나쁜 상황에 대한 시나리오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상황이 실제로 나쁜 쪽으로 흘러가면, 시장 참여자들은 기겁하고 정책 당국자들은 허둥지둥한다”라고 지적했다. 이것은 우리가 지난 5~6개월 목격한 일인데, 이런 모습은 실제 위기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이다.

미네르바 신드롬이라는 ‘다중 지성’이 대안?

이 자리에서는 미네르바 팬덤 현상이 정부가 신뢰를 잃어 생겼다는 기존의 지적을 환기하며 미네르바 현상으로 대표되는 ‘다중 지성(多衆知性·swarm intelligence, 사회 이슈에 무리지어 합리적으로 반응하는 대중)’을 대안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마저 제기되었다.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강만수 장관을 바꾼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위기의 원인은 이명박 정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정책결정 구조라는 큰 그림에 문제가 생겼다”라며, 궁극 해법을 인터넷 공간에서 찾았다. 인터넷 공간에는 경제 현상이나 정책을 이해하려는 국민의 욕구가 분출하므로, 경제정책 결정 구조의 민주화와 정책 담론의 진화를 위해 중요한 인터넷에서 참여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11월24일 방송통신위원회 주최로 열린 ‘인터넷@한국 사회, 한국 사회@인터넷’ 심포지엄에서도 제기되었다. ‘인터넷과 루머:아고라 경제토론방의 경우’를 발제한 김현경 박사(연세대)는 “아고라는 루머의 온상이라기보다 시장의 불확실성에 스스로 대처하려는 사람들의 모임에 가깝다. 아고라에서는 추천, 평판, 다른 글 보기 같은 기능을 통해 근거 없는 주장은 걸러진다”라고 분석했다.
 
제도권 밖에서 익명의 섬에 숨어 최악의 상황을 제기하는 극단적 비관론은 자기실현적 예언이나 구성의 오류 같은 악순환을 낳는다는 부정적 시각과, 미래의 길흉을 예견하는 도참(圖讖) 같은 구실을 하는 그의 주장을 경청해야 한다는 긍정론까지, 미네르바를 이해하는 한국 사회의 스펙트럼은 간극이 넓다. 미네르바는 현인(賢人)인가? 극단적 비관주의자일 뿐인가?

기자명 장영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coo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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