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중동포, 즉 조선족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서울 밤거리의 신풍경으로 떠오른 음식이 있지. 바로 양꼬치. 중국에서도 양꼬치는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이 양꼬치를 처음 ‘개발’한 사람들은 중국 서쪽의 신장성(新彊省:오늘날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 많이 사는 위구르인들이라고 해.
755년 중국 당나라에서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난다. 당나라의 인구가 3분의 1로 줄었다 할 정도로 참혹한 전란이었지. 이때 당나라는 이웃 나라에 도움을 청했고 북방 초원지대의 회흘(回紇)도 군대를 보냈는데, 이 회흘이 바로 위구르인들의 나라였어. 위구르 사람들은 당나라 반란군을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웠지.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단다. 당나라 사람들이 위구르 때문에 허리가 휜다고 아우성을 칠 만큼 위구르인들은 막대한 보상을 받아냈지.
이토록 강력했던 위구르는 인근 키르기스인들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고 위구르인들은 이후 이렇다 할 나라를 세우지 못한 채 중국 서쪽, 중앙아시아 일원에서 명맥을 이어갔어. 13세기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군들이 화산처럼 폭발하여 유라시아 대륙을 덮은 뒤 위구르인들은 ‘색목인’ 중의 하나로 몽골인들의 적극 협조자가 된다.
이 위구르 출신 색목인 가운데 설손(薛遜, ?~1360)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원나라 황태자의 스승이 될 만큼 학문에 밝았던 그는 한족(漢族) 반란군이었던 홍건적들을 피해 고려로 피란 오게 된다. 원나라 황태자를 가르칠 때 교분을 쌓았던 영특하고 예민했던 청년이 고려의 공민왕이 돼 있었거든. 공민왕은 그에게 관직과 토지를 내리는 등 후히 대접했고 위구르인 설손은 고려인으로서 새 인생을 시작해. 이 설손의 장남이 설장수(1341~1399)라는 사람이야.
그가 고려 땅을 밟은 건 나이 열일곱 살 때였어. 위구르인으로 몽골족이 다스리는 중국 땅에서 성인이 되도록 자랐으니 중국어나 몽골어에는 능숙했겠지만 고려 말은 그렇게 유창하지 못했을 거야. 후일 그 조카가 숙부 설장수를 얘기하면서 “고려에 들어올 당시 고려 말을 대강 했다”라고 했으니 말이야. 하지만 설장수는 고려 망명 4년 만에 문과에 급제하는 기염을 토했고 “성품은 곧고 굳세며 ‘말을 잘하여’ 칭송받는”(〈조선왕조실록〉, 설장수 졸기 중) 고려 관료로서 격동의 고려 말엽의 역사를 헤쳐나가게 돼.
특히 그는 외교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어. 고려의 멸망을 불러온 위화도 회군의 시발은 명나라에서 날아든 ‘철령위(鐵嶺衛)’ 설치 소식이었는데 이를 고려에 전한 사람 역시 설장수였어. “철령 이북은 원래 원나라에 속하였으니 모두 요동에 귀속시켜라”는 명나라 태조의 서슬 퍼런 명령. 격노한 고려의 우왕과 최영은 군대를 일으켰지만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 명나라 공격을 거부한 이성계가 새 왕조 조선을 창건했어도 국제 정세는 불안했단다. 의심 많은 황제로는 중국 역사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주원장이 조선을 흰 눈으로 보고 있었거든. “조선 너희가 믿는 것은 바다가 넓고 산이 험준한 것인데… 병력이 백만이고 전함이 천리에 뻗치니 발해의 수로와 요동의 육로로 쳐들어간다면 너희 조선쯤이야 아침 한 끼 거리도 되지 못하니…(조선 개국 1년 후 명 태조 주원장의 국서).”
주원장은 조선이 껄끄러웠던 거야. ‘아침 한 끼 거리’도 안 된다면 왜 백만 대군을 동원하겠니. 더구나 고려는 국력을 기울여 요동 지역을 집요하게 노렸고, 이성계는 한때 고려의 장군으로서 압록강을 넘은 경험도 있단 말이지. 여기에 이성계의 오른팔 정도전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일이 틀어지면 군대를 몰고 와서 한바탕해주지” 하며 호기를 부린 것이 주원장의 귀에 들어가면서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됐어.
여덟 번 명나라 드나들며 외교 협상
명나라는 정도전을 화근(禍根)이라 부르며 명나라로 보내라고 압박했고 정도전은 되레 요동 정벌 계획을 세우면서 물러서지 않았지. 전쟁을 불사하고 정도전을 보호했던 태조 이성계지만 정도전을 승진시키는 바로 그날, 설장수의 벼슬도 올려준단다. 설장수의 외교적 능력을 인정한 인사였지. 그는 도합 여덟 번이나 명나라를 드나들며 신생 조선과 명나라 사이를 조율했어. 정종 1년에 설장수가 받아온 명나라의 국서는 그 외교전의 하이라이트라 할 만해. “의례는 명나라 것을 따르고 예전 법을 지키되 스스로 다스릴 것을 허락하노라.” 즉, 자기들 비위만 안 건드리면 너희 맘대로 살게 놔두겠다는 얘기야.
위구르계 고려인 설장수는 통역 양성기관인 사역원의 제조(提調)로서 외교 인재 양성의 기틀을 닦기도 했어. 〈조선을 통하다〉(이한우, 21세기북스)를 보면 1394년 설장수가 사역원과 관련된 건의를 올린 내용이 나오는데 매우 구체적이고 실용적이야. 학생도 선생을 평가하는 현대의 ‘교원평가제’ 같은 제도의 도입을 주장하는가 하면, 시험을 보되 사역원 출신 외에도 시험을 치를 수 있게 개방하자고 주장했어. 오늘날에도 외무고시 출신들이 주요 직위를 독점하는 ‘순혈주의’에 대한 비판이 있는데, 설장수는 사역원 학생들에게 특혜 대신 경쟁이라는 자극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게 아닐까 싶어. 그런 의미였을까. 설장수는 3년을 공부해도 외국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면 사역원에서 쫓아내 군대에 보내자고 건의하기도 하지. 가히 “외교 업무를 일선에서 수행한 데서 나오는 실무 경험의 반영”(이한우, 〈조선을 통하다〉)이었다고나 할까.
하나 더, 설장수는 무슬림이었을 가능성도 있어. 고려 말 벽란도 등지에는 적지 않은 수의 무슬림과 색목인들이 정착해 살았고 상당수는 설장수처럼 위구르인이었으니까. 태종 7년(1407) 1월17일 실록에도 ‘회회 사문(이슬람교 승려) 도로(都老)가 처자를 데리고 함께 와서 조선에 머물러 살기를 원하니 임금이 집을 주어 정착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이 도로라는 이는 막대한 양의 수정(水晶)을 캐서 바쳤다고 해. 심지어 세종이 즉위할 때에는 이슬람 성직자가 쿠란을 읽으며 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회회송축(回回頌祝) 행사도 있었다. 세계 제국 몽골의 영향하에 있었던 고려의 국제적 분위기는 조선 초까지 이어졌던 거야.
설장수는 그의 사후 점차 폐쇄적으로 변해간 조선을 바라보며 마음 아파했을지도 모른다. 세종 9년, 예조(禮曹)의 보고야. “회회교도는 의관이 보통과 달라서, 사람들이 모두 보고 우리 백성이 아니라 하여 더불어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합니다. 이미 우리나라 사람인 바에는 마땅히 우리나라 의관을 좇아 별다르게 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혼인하게 될 것입니다.” 파란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 고려 장군이 되고 위구르인이 조선의 외교를 도맡던 시대는 선명하게 존재했으나 우리 기억 속에서 가물거리는 역사가 되어갔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다문화 가정의 친구를 집단폭행해 견디다 못해 투신하게 만들고, 경찰에 출두할 때에도 피해자로부터 빼앗은 옷을 버젓이 입고 나오는 ‘사악한(미안하지만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소년들을 기른 역사 속에 살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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