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3월22일 이수근 조선중앙통신 부사장이 판문점을 넘어 귀순했다. 그는 1953년 휴전 이후 당시까지 가장 거물급으로 꼽힌 귀순자였다. 그해 5월3일 치러질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정희 후보에게 그의 귀순은 큰 호재였다. 중앙정보부(중정)는 그를 박정희 정권의 치적과 체제의 우월함을 알리는 선전 도구로 이용했다. 이후 중정은 이수근에게 ‘정세판단관’이라는 1급 직책과 자동차와 집을 내주며 환대했다. 또 서울에 있는 그의 처가 쪽 사람들도 찾아내 인사시켰다.

1924년 황해도 서흥 출생인 이수근은 해방 후 개성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서울 출신 여성과 결혼했다. 가족을 북한에 두고 내려온 이수근은 그때까지 얼굴도 이름도 모르던 처조카 배경옥씨를 중정의 주선으로 처음 만났다.

이수근은 시간이 갈수록 박정희 체제를 찬양하는 선전 도구로만 이용하려는 중정의 행태에 환멸을 느꼈다. 특히 중정 감찰실장 방준모가 그를 괴롭히며 모욕을 주었다. 결국 이수근은 처조카 배경옥에게 감찰실장 방준모의 악행과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남과 북 모두 내가 살 수 있는 곳이 못 되니 영세중립국인 스위스로 가서 조용히 집필 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

ⓒ시사IN 신선영이수근의 처조카 배경옥씨(사진)는 간첩 혐의로 수감된 지 21년 만인 1989년 12월22일 형 집행정지로 출소했다.

당시 이수근의 처조카 배경옥씨는 베트남에 주둔한 미군 1사단에 엔지니어로 파견근무 중이었다. 배씨는 홍콩을 경유해 스위스로 가려는 이수근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서 미군 브로커를 통해 위조 여권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이들은 중정 공작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홍콩에서 국내로 압송했다. 중정은 이수근과 배경옥 두 사람에게 간첩죄를 씌웠다. 중정은 “이수근은 북한의 지령을 받고 위장 귀순한 이중간첩이다”라고 발표했다. 고문으로 조작된 간첩 혐의에 대해 1심은 두 사람 모두에게 사형을 판결했다. 이수근은 항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50일 만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1969년 7월3일, 이수근은 마흔여섯 삶을 마감했다.

사형수 배경옥은 항소심을 거쳐 이듬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배씨는 수감된 지 21년 만인 1989년 12월22일 형 집행정지로 출소했다. 배씨는 그날부터 본인과 이모부 이수근의 억울한 사건을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그 결과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수근 위장귀순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발표했다. 배경옥씨는 재심을 청구해 2008년 본인 사건에 대해서는 무죄판결을 받아냈다. 당시 재판부는 “이수근씨를 위장간첩으로 인정할 증거가 없다”라고 밝혔다.

배씨는 이모부 이수근의 재심도 청구했다. 하지만 법원은 2011년 11월 배씨에게 재심청구권이 없다며 기각 결정했다.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사망한 자의 재심은 검사·배우자·직계친족 또는 형제자매만 청구할 수 있다. 이수근은 홀로 귀순했기에 검사만 재심을 청구할 수 있었다. 배씨는 2013년 대검찰청에 진정을 접수했다. 검찰은 3년 뒤인 2016년 2월 “배경옥의 진술, 배경옥에 대한 재심 판결문과 기타 제출 자료 등만으로는 형사소송법 제420조에 따른 재심 청구 사유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배씨에게 통보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지난해 9월 대검찰청이 이수근 위장간첩조작 사건 등 권위주의 정부 시기의 인권침해 사건 7건에 대해 직접 재심을 청구했다. 지난 10월1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는 이수근의 간첩 혐의에 관해 무죄를 선고했다.

ⓒKTV 갈무리1967년 3월22일 이수근 조선중앙통신 부사장이 판문점을 넘어 귀순했다.

이수근 무죄판결 직후, 21년 옥살이 끝에 자신과 이모부의 무죄를 이끌어낸 배경옥씨를 만났다. 배씨가 이수근이 이모부라는 사실을 언제 알았는지부터 궁금했다. “1967년 봄 나는 베트남에 있는 미군 1사단 소속 파월 엔지니어로 근무 중이었는데, 베트남에도 이수근 귀순 뉴스가 나왔다. 그걸 보며 ‘아~ 별사람도 다 있네’ 하고 넘겼는데 얼마 뒤 뜻밖에도 중앙정보부에서 귀순자가 내 이모부라고 연락해왔다. 그 뒤 귀국해 중정 직원들과 같이 온 이모부를 만났다.” 이모는 개성에서 〈노동신문〉 기자로 있던 이수근을 만나 결혼했다.

배경옥씨가 기억하는 이모부 이수근은 어떤 사람일까. “김일성 주석 수행기자도 지내는 등 북에서는 능력을 인정받으며 최고위급 대접을 받고 살았지만, 자유분방한 기질 때문에 북한 체제에 답답함을 느껴 귀순을 결심했다고 하시더라.” 중정이 밝힌 귀순 동기에 따르면 이수근은 북한군 창립 기념행사에 김일성 주석을 수행 취재했다가 연설 내용을 보도하지 않았다. 이 일로 책임을 추궁당할 처지가 되자 판문점 행사 취재차 들른 길에 귀순을 결행했다고 한다.

이수근은 왜 스위스로 가려 했나

이모부가 중정에 1급 간부로 채용돼 반공 강연을 다니며 활동하는 것을 본 배씨로서는 그가 간첩 사건에 휘말리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더구나 머나먼 베트남에 파견근무 중이었던 배씨로서는 한동안 이모부 근황을 알 수도 없었다. 그러다가 1969년 초 당시 여동생 결혼식 참석차 일시 귀국한 배경옥씨가 이모부 이수근을 만났다. 이수근은 처조카 배씨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중앙정보부 감찰실장 방준모가 이모부에게 걸핏하면 권총을 들이대며 위협하고 폭행한다면서 죽을 맛이라고 하소연했다. 중립국인 스위스로 가겠다고 하시더라. 스위스에 가서 책도 쓰면서 무슨 수를 쓰든 북에 있는 가족을 불러내 가족을 버린 죄책감을 씻고 여생을 같이 보내고 싶다는 거였다.”

배씨는 북한에 있는 이모를 어떻게든 스위스로 데려와 살겠다는 이모부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한다. “홍콩까지 같이 나가서 나는 베트남행 비행기를 타고, 이모부는 캄보디아를 거쳐 스위스로 가는 루트를 짰다. 1969년 1월27일 서울을 출발해서 일본을 거쳐 홍콩으로 들어갔지만 이미 중정에서 영사관에 연락해 홍콩 경찰이 우리를 붙잡았다. 경찰서에서 이틀을 잤다.” 이후 두 사람은 그해 2월1일 한국으로 압송됐다. “이모부가 간첩이었다면 홍콩에서 바로 옆에 있는 마카오 북한 대사관으로 들어갔겠지. 그러나 중립국이 목표였기에 아예 관심이 없었던 거다. 중립국으로 가려다가 결국 체포돼 한국으로 돌아온 거다.”

압송된 두 사람은 바로 남산에 있는 중정 조사5국으로 끌려갔다. “구조가 둥그런 반원형 철제로 된 공간에 들어가 알몸 상태로 수갑 채우고 고문기술자 10명이 삥 둘러서서 구둣발로 차고 때리고 온갖 고문을 다 하는 거다. 잠 안 재우기, 물 고문, 전기 고문, 통닭구이 고문 등 안 받은 고문이 없었다. 진술서는 그들이 날조해 불러주는 대로 토씨 하나 안 틀리게 썼다.”

당시 두 사람 외에도 배씨의 막내 여동생 등 4명이 불고지죄와 간첩방조죄 등으로 구속됐다. 두 사람이 출국할 때 김포공항에 배웅 나왔다는 이유에서다. 중정이 고문으로 만든 조서를 검찰에 넘기자 검사가 서대문에 있는 서울구치소 소장실로 찾아와 둘을 직접 조사했다. “검사 앞에서 고문으로 조작한 사건이라고 사실대로 얘기했더니 검사가 아무 말 없이 나가버렸다. 중정 요원들이 다시 들어와 때리고 고문을 해댔다. 그러니 어디에도 사실을 얘기할 수 없었다.”

1심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구치소로 돌아오던 길에 이모부 이수근은 배씨에게 “항소할 것이니 너도 반드시 항소하라”고 당부했다. “구치소에서 이모부에게 사형을 집행하던 날은 재소자 누구도 출역 나가지 못하게 한 날이라 잊을 수 없다. 나도 차라리 죽여줬으면 싶었다. 고문 후유증 때문에 이건 사는 게 아니다, 이렇게 사느니 빨리 죽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될 만큼 그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이때 배경옥씨 나이 서른 살, 밖에는 아내와 다섯 살 난 아들, 그리고 아내 뱃속에 딸이 자라고 있었다. 중정은 구속 후 10개월 만에야 처음으로 배씨에게 가족 면회를 허용했다. 어머니와 동생, 아내가 면회를 왔는데 배씨는 갓 태어난 딸 얼굴도 그날 처음 보았다. “아내는 혼자 아들딸을 키우면서 아이들이 간첩 자식이라고 놀림받을까 봐 아빠가 죽었다고 했나 보더라. 나로 인해 가족이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죄인 된 심정으로 수감 기간 내내 자식들 얼굴도 못 보고, 죽은 사람처럼 지냈다.”

감옥에서도 그는 ‘국제 간첩’이라 불리며 독방에 갇혀 감시받았다. 처음에는 자기만 억울하게 조작 간첩이 된 줄 알았는데 교도소에서 ‘막걸리 보안법(반공법)’ 피해자 등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광주교도소에서 만난 진도 가족간첩단 사건 박동운씨와 강원도 납북어부 간첩 사건 등이 나랑 비슷했다. 특히 강원도 할아버지 어부들은 한글로 자기 이름도 쓰지 못하는데 간첩으로 엮여 장기수로 살다가 감옥에서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앞으로도 없는 것처럼 지내요’

배씨는 고문의 상처가 아물자 차츰 살아서 나가야겠다는 의지도 생겼다. 언젠가 나가게 되면 아들딸이 교도소 안에서 뭐 하고 지냈느냐고 물을 때 어떻게 답할지 신경이 쓰였다. “광주교도소에서 내가 교도소장에게 수용자들 여유 시간에 뭔가 배울 수 있도록 문예반을 만들자고 건의했다. 서예, 창작, 회화 세 가지였다. 그렇게 문예반이 창설됐다. 미술대회에 출품해 입상하기도 했다. 붓을 잡으면 교도소 안에서 시간이 잘 간다.”

배씨는 1987년 6월항쟁이 일어난 지 2년여 만인 1989년 12월 특별사면되었다. 51세에 출소해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들이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그동안 서로 없는 것으로 알고 지냈는데 앞으로도 없는 것처럼 지내요’라고 하더라. 가슴이 미어졌지만 ‘너희들의 원하면 그렇게 하마’라고 대답해주었다. 몇 달 뒤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귀던 여자가 있었는데 간첩 아버지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던 것 같더라. 지금도 그게 제일 마음에 걸린다.” 교도소에서 처음 얼굴을 보았던, 갓 태어난 딸과도 연락이 끊겼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서 취업해 혼자 지내는 거 같더라. 연락이 뜸하고 남처럼 산다.” 박정희 정권의 국가 폭력으로 처참하게 파괴된 비운의 가족사를 들려주는 배경옥씨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석방된 뒤에도 ‘간첩’ 딱지는 10여 년 동안 따라다녔다. 보안관찰 대상자로 지정돼 가는 곳마다 정보과 형사가 늘 감시했다. “나는 죄 없는 사람이라고, 재심할 거라고 경찰관에게 말하고, 계속 감시하면 가만히 안 있겠다고 화냈지만 소용없더라.” 그는 동생들의 도움으로 2005년 7월 재심을 신청했다. 재심 법정에는 이례적으로 이수근과 배경옥씨를 베트남에서 체포한 이대용 전 베트남 공사가 증인으로 출석해 결정적 진술을 했다. “김형욱 정보부장이 이대용 공사의 군 후배인데, 이수근 사건이 터지고 김형욱 부장이 이대용 공사에게 전화해서 ‘선배님, 이수근 간첩 아닌 거 우리 몇몇 사람만 아니까 절대 얘기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신신당부했다고 법정에서 증언해주더라.”

현재 이수근의 제사는 배경옥씨가 지낸다. 처음에는 사형당한 이모부 이수근의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도 몰랐다. “연고가 없이 병사하거나 사형당한 시신 276기를 벽제공동묘지 한쪽에 한데 합장했다고 하더라. 현장에 가보니 유해를 분리할 수 없었다.” 배씨는 이수근의 무죄판결이 시작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이모부에 대한 민사 보상 판결이 이뤄지면 ‘이수근 장학재단’을 만들어 인권교육 체험장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또 자신과 이모부의 사연이 좀 더 알려질 수 있도록 영화로 제작하고 싶다고 했다. “정의 사회를 만들려면 국가 폭력의 참상을 기억하는 영화가 필요합니다. 우리 사건은 영화 같은 얘기지만 실제 있었던 사실이니까요.”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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