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가 붐’이라는 둥, ‘미투 시대’라는 둥 호들갑의 이면에, 해저에서 지진이 난 후 쓰나미가 밀려오는 것처럼 ‘백래시(반발 심리 및 행동)’의 파고가 높다. 자신이 당한 피해를 말하는 피해자들이 등장하고, 사회는 동요했다. 하지만 사회가 귀를 기울이는 것과 사법기관이 변하는 것은 전혀 다른 속도다.

그러는 사이 인터넷 익명 뒤에 숨어서 성폭력 피해를 입 밖으로 꺼낸 피해자들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고 평가하다 못해 조롱하는 일들 역시 일상이 되었다. 현실의 미투는 하기 전이나 하고 난 후나 험난하고, 인터넷상의 폭력은 어려움도 망설임도 남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을 둘러싸고 ‘진짜 미투’ ‘가짜 미투’를 논하며, 이를 언론이 보도라는 이름으로 조력하는 지경이 되었다.

긴 시간 가해자 중심의 시선과 적용이 객관과 합리라고 여겨지던 사회에서 성폭력 문제를 꺼내놓고 해결하려는 피해자들의 움직임은 낯설기 그지없다. ‘빌미를 줘놓고 이제 와서 무슨 딴소리야’라고 쉽게 생각하고 행동하던 사람들에게, 낯선 움직임은 위협이 되고 불편하다. 변화하는 힘보다 이를 무시하고 억압하려는 힘이 훨씬 세다. 애초에 옳기 때문이 아니라 힘의 우위에서 유지되어왔기 때문이다.

ⓒ정켈 그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성폭력 사건을 들여다보면, 세간의 주목이 피해자들에게 좋게만 작용하지는 않는다. 피해자가 검사나 변호사, 대기업 직원, 어린 학생이라면 사정은 조금 나은 편이다. 이런 경우 사건이 불거지면 가해자가 부각되고, 피해자가 무결해야 한다는 강박이나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일은 현저히 줄어든다. 반대로 피해자의 직업이나 삶의 이력이 소위 ‘정조를 보호할 가치가 없다’는 편견을 받을 만한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피해자가 사실을 말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의심을 넘어 확신이 된다. 그 순간 다수가 몰려들어 그간 성폭력을 말하던 피해자들에 대한 불만과 불안, 의심과 비난을 쏟아낸다. 이런 일들은 주로 인터넷상에서 펼쳐진다. 문제는 이런 행태가 사회 전반의 여론처럼 착각된다는 데 있다. 피해자는 다수가 지켜보는 앞에서 모욕과 폄훼 속에 던져진다. 피해자가 정신적으로 너덜너덜해지는 사이,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피해자나 주변인들은 위축된다.

말을 하는 피해자만 이런 모욕과 폄훼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다. 맡은 사건의 절반 이상이 성폭력 피해자 사건인 변호사로 살아가면서 욕이나 모욕, 루머는 별책부록처럼 주어진 숙명이 됐다. 피해자의 사건이 세간에 이슈가 될수록, 피해자에 대한 무분별한 모욕과 폄훼가 이어지는 사건일수록, ‘별책부록’의 양도 질도 두툼해진다.

변호사의 일은 피해자 옆에서 함께 걸어가는 것

세상에 대고 말을 한 피해자의 말이 사실인지, 피해자가 한 말 모두가 한 조각 틀림없이 전달되었는지를 피해자의 변호사가 모조리 확인할 순 없다. 변호사의 일은 피해자를 믿고 피해자의 주장을 수사기관이나 법원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바꿔 전달해 최대한 법이 살펴보아야 할 부분들을 놓치지 않도록 조력하는 것이다. 변호사는 수사나 판단의 주체가 아니다. 변호사의 일은, 피해자가 진실을 다투는 동안 옆에서 함께 걸어가는 일에 가깝다. ‘변호사 네가 뭘 아냐’라든가 ‘알면서 왜 그러냐’는 식의 트집은 무지에서 빚어진다.

그럼에도 변호사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조롱은 피해자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그저 오늘도 꿈꿀 뿐이다. 내가 하는 일이 성폭력 피해자가 숙명처럼 받아안은 유무형의 폭력을 기꺼이 나눠 지는 일이기를.

기자명 이은의 (변호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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