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로빈은 자주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야.” 그럴 때마다 친구가 맞장구를 쳐주었다. “아무것도 안 하다 보면, 대단한 뭔가를 하게 되지.”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둘은 참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하루하루가 금방 가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로빈이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안 할 수가 없게 되었어.”

기숙학교에 간다고 했다. 거기 가면 할 일이 많다고 했다. 그래도 널 잊지 않겠다고, 로빈은 약속했다. 친구는 그 말을 믿었다. 하루 또 하루 그리고 다시 하루… 많은 날이 지나는 동안 로빈은 점점 더 할 일이 많아졌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걸 제일 좋아하던 꼬마가, 어른이 된 뒤에는 끊임없이 뭔가를 하고 있었다. 하지 않는 건 딱 하나였다. 친구 생각. 곰돌이 푸 생각.

영화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는 그렇게 시작한다. 친구를 까맣게 잊고 오늘도 하얗게 불태우며 살아가는 중년의 크리스토퍼 로빈(이완 맥그리거)이 주인공이다. 언제나처럼 할 일을 잔뜩 끌어안고 퇴근한 주말 오후. 짠! 푸가 나타난다. 예전 모습 그대로, 예전 말투 그대로다. 로빈은 할 일이 정말 많았지만, 잃어버린 친구들을 찾아달라는 푸의 요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한다. 얼떨결에 모험이 시작된다. 아무것도 안 하는 무위(無爲)와 꿀단지를 탐하는 도식(徒食)의 기쁨에 다시 젖어든다.

〈정글북〉(2016), 〈미녀와 야수〉 (2017) 등 자신들의 고전 애니메이션 명작을 차례차례 실사화하고 있는 디즈니가 〈위니 더 푸〉도 실사 영화로 만들겠다고 했을 땐, 솔직히 걱정이 앞섰다. 얼핏 전해진 스토리 라인은 〈후크〉(1991)의 재탕이 틀림없었다. 어른이 된 소년, 너무 바쁜 일상, 갑자기 찾아온 어릴 적 친구들, 다시 들어간 환상의 세계, 덕분에 동심을 되찾고 더 좋은 아빠가 되는 주인공…. 직접 본 영화의 이야기 역시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만듦새가 기대 이상이었다.

마크 포스터 감독의 작품, 솜씨가 좋네

마크 포스터 감독의 공이라고 믿고 싶다. 〈007 퀀텀 오브 솔러스〉 〈월드워 Z〉처럼 덩치 큰 장르 영화도 잘 만들지만, 〈몬스터볼〉 〈연을 쫓는 아이〉 〈스트레인저 댄 픽션〉처럼 작고 힘센 영화도 솜씨 좋게 만드는 그다. 특히 〈네버랜드를 찾아서〉에서 보여준 ‘아이 같은 어른스러움’과  ‘어른스러운 아이다움’의 멋진 균형을 이 영화에서도 보여주니 좋았다. 곰돌이 푸 말고도 내가 특히 좋아하던 캐릭터, 언제나 우울한 당나귀 ‘이요르’까지 사랑스럽게 그려주니 더욱 좋았다.

극장을 나서는 내 머릿속에선 결국, 다시, 또 이 말이 맴돌았다. “인간은 잃어버린 시간, 놓쳐버린 시간, 또는 아직 성취하지 못한 시간 때문에 영화관에 간다.”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콥스키가 자신의 책 〈봉인된 시간〉에 쓴 말은 이번에도 옳다. 나는 또 대책 없이 이 영화에 빠져들고 말았다. 많이 웃었고, 조금 울기도 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쇼핑에 나선 지난 주말, 작고 귀여운 곰 인형 하나를 사들고 집에 왔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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