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어떤 음악을 하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되묻곤 했다. “노찾사나 꽃다지 아세요? 안치환이나, 정태춘·박은옥은요? 그런 노래 불러요.” 아니면 “생활 가요를 부른다”라고 말했다. 어느 공연에서는 사회자가 자신을 ‘배고프고 가난한 민중가수’라고 소개했다. 지나친 미사여구로 포장하는 것도, 너무 어렵게 살아가는 이로 비치는 것도 싫다. 다만 이렇게 불러주면 좋겠다. 모든 사회적 아픔과 연대하는 가수.

가수로 ‘이명박근혜’ 시대를 살았다. 홈플러스, 이랜드, 재능교육, 쌍용차, 세종호텔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장기 투쟁 사업장에서 노래를 불렀다.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고, 정권의 만행에 항의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올봄에는 제주 4·3 사건 70주년을 맞아 김성민, 류금신, 손병휘, 안석희(유인혁), 연영석, 우리나라, 이씬, 임정득 등과 함께 컴필레이션 음반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사법농단 규탄 집회, 불교 개혁을 외치는 현장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누군지 잘은 몰라도,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어디에선가 가수 이수진의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

ⓒ시사IN 조남진이수진씨는 올해로 첫 앨범을 낸 지 10주년을 맞았다. 1집에 실린 ‘아프게 하지 마라’는 지금도 꽤 많은 이들이 부르는 노래다.

살면서 가수를 꿈꿔본 적이 없었다. 중학생 때 꿈은 개그우먼이었다. 사람들이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학생운동을 한 적도, 이름난 노래패에 몸담은 적도 없다.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고 20대 초반 금융회사에서 일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문화 활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무대’와 가까운 곳에서 일을 했으면 싶었다. 1990년대 말 인천의 ‘시민문화예술센터’ 라는 문화운동 단체에 제 발로 찾아갔다.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에 영화를 상영하는 ‘동네 영화제’에 참여했다. 그냥 막일하는 스태프였다. 그것을 인연으로 ‘운동’하는 이들에게 빠져들었다. 2000년 무렵 단체에서 노래모임을 만들 때 가수로 발탁됐다. 그것이 노래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는 2008년 첫 음반을 냈다. ‘바위처럼’의 작곡가 유인혁씨 등과 함께 작업했다. 1집에 실린 ‘아프게 하지 마라’는 지금도 꽤 많은 이들이 부르는 노래다. 시민문화예술센터에서 만난 최경숙씨가 만들었다. 2013년 나온 2집 음반에는 자신이 만든 곡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가수 데뷔 이후 그는 자기 노래보다 ‘남의 노래’를 더 불러야 했다. 그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노래를 불러주기 원했다. 기륭전자 투쟁 때였나. 매일 밤 문화제가 열렸다. 민중가요만 부르기가 지겨워서,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를 불렀다. 언니들이 열광적으로 좋아했다. 그거면 됐다 싶었다.

민중가수라는 말이 낯선 시대다.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어떤 뮤지션들은 이제 완전히 다른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간다. 얼마 전에는 ‘단결투쟁가’ ‘희망의 노래’ ‘포장마차’ ‘잘린 손가락’ ‘꽃다지’ 등 숱한 명곡을 만든 작곡가 김호철씨의 아내이자 민중가수인 황현씨가 암 투병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따로, 또 같이 살아왔던 민중음악계 동료들이 후원 음악회를 열고 후원 주점을 열었다. 지난여름 열린 후원 주점에서 이수진씨도 서빙을 했다. 이제라도 민중가요의 역사를 백서로 정리해보려는 움직임도 있다.

ⓒ신디 제공지난 5월 서울 중구 명동 세종호텔 앞에서 열린 세종호텔노동조합 목요집회에서 공연하고 있는 이수진씨.

이수진씨는 민중가요의 역사에서 막내뻘이다. 여러 선배들의 ‘빛나던 시절’은 사실 말로만 들었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과거에 발목 잡히지는 않으려 한다. 그런 좋은 시절이 있었어? 그랬구나, 끝. 아마 지금 활동하는 모든 민중가수들이 이런 마음가짐일 것이다. 지금 민중가요가 잊힌 것에 대해서도 그는 뜻밖에 ‘쿨’하다. “민중가요가 후지거나 시대에 뒤떨어져서 쇠락한 게 아니거든요. 노동운동, 민중운동이 쇠퇴하면서 민중가요도 그렇게 된 거예요. 사람들은 집회장에서 왜 여전히 30년 전 노래를 들어야 하느냐며 불평하지만, 사실 사회운동 하는 이들도 새로운 민중가요를 찾아 듣지는 않아요. 그런 거죠.”

“‘나를 향해’ 눈과 귀 여는 관객이 있어”

가수로 산 지난 10여 년 동안 그는 ‘현장’에 있었다. 분노와 비통이 쏟아지는 자리일 수밖에 없었다. 늘 그런 곳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이 힘겹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가 가방 속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고공 농성하는 노동자를 응원하기 위해 만든 책 〈마음은 굴뚝같지만〉이었다.

“제 마음이 이래요. 폭우가 내리면 굴뚝에서 고공 농성하는 이들을 생각하고, 막 즐겁다가도 내가 이렇게 즐거워도 되나 싶고. 그렇다고 너무 힘들어해도 안 될 것 같죠. 왜냐하면 그들보다 난 덜 힘드니까. 사회적 아픔과 함께하는 삶은 때로 힘들고 지치죠. 지금도 무대에 서기 전에는 늘 떨리고 긴장돼요. 내가 과연 이 노래를 불러도 되는 걸까. 그들에게 좋은 기운을 줄 수 있을까. 다만 믿는 건, 그동안 내가 부른 노래를 사람들이 좋아해주었다는 것. 그거죠.”

2집 음반에 ‘그댄 나에게’라는 곡이 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 속에 서서/ 언제나 나를 향해 나를 향해/ 그댄 나에게 따뜻한 난로인 거야 그댄 나에게 기대고 싶은 나무인 거야.’ 궂은 날에도 자신 앞에서 노래를 들어주는 이들에 대한 사랑을 담아 만든 노래다. 그래서 그는 다른 가수들과 달리 클럽 공연을 하고 싶은 욕망이 없었단다. 눈비 오는 야외에서라도 ‘나를 향해’ 눈과 귀를 여는 관객이 있었으니까. 요즘은 좀 달라졌다. 이제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도 있다. 기타를 만들던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부당해고 문제를 알리기 위해 스스로 ‘콜밴’이라는 밴드를 만들어 클럽 공연을 연 것처럼.

인터뷰 내내 이수진씨는 왜 자신을 인터뷰하느냐고 물었다. 좀 더 널리 알려진, 재미있고 의미 있는 사람을 다뤄야 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스러워했다. 유튜브에서 모창만 잘해도 스타가 되는 시대에, 음반을 두 장 냈고 한 달에도 몇 번씩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이런 말을 한다. 이날은 올해로 첫 앨범을 낸 지 10주년을 맞은 어느 가수가 생애 첫 언론 인터뷰를 한 날이었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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