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4일은 제1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었다. 1991년 8월14일, 고 김학순 할머니가 국내 최초로 공개 기자회견에서 피해 사실을 밝힌 이날은 그동안 시민단체 차원에서 기념해왔으나 올해부터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한 사람의 용기 있는 외침은 국내외 연대를 이끌어내는 마중물이 됐다. 그 덕분에 국내 피해자는 물론이고 네덜란드·중국·타이완· 인도네시아 등 세계 각국의 피해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
일본 여성학자 우에노 지즈코 교수는 7월24일 〈아사히 신문〉 계열의 웹사이트 〈웹 론자(WEB RONZA)〉에 ‘성희롱 피해자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이 글에서 우에노 지즈코는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주체’의 등장이자, “실은 나도…”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또한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이 ‘미투 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고 평했다.
김학순 할머니의 폭로로부터 정확히 27년이 지난 2018년 8월14일, 미투 운동과 관련된 사건 중 처음으로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수행비서 성폭력 혐의 등에 대해 1심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어떠한 위력을 행사했고, 피해자가 이에 제압당할 만한 상황이었다고 볼 만한 사정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재판부가 가장 강력한 증거인 피해자 진술에 대한 신빙성을 부정하고 업무상 위력에 대한 판단을 너무 좁게 해석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이 제기된다.
재판부의 무죄판결이 있던 날 저녁,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 앞은 안타까움과 분노를 지닌 시민 500여 명으로 가득 찼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함성에 반가움보다는 서글픔이 앞섰다. 우리는 언제까지 광장에, 거리에 나와야 하는 것일까?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며 박근혜 정권 퇴진에 찬성하지만 언론의 여성혐오적 보도는 근절돼야 한다고 외쳤다. 강남역에서는 폭우를 맞으면서 성차별을 끝장내자고 소리쳤다. 혜화역에서는 빨간 옷을 입고 경찰이 불법촬영 범죄 근절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외쳤다. 홍대 앞에서는 검은 옷을 입고 낙태죄가 폐지돼야 한다고 외쳤다. 그리고 다시 서울서부지법 앞에 모였다. 그사이 손에 쥔 것은 핫팩에서 선풍기로 바뀌고, 기온은 40℃쯤 올라갔는데 여성 인권은 여전히 한겨울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 이후로 미투 운동이 위축되는 것 아닌가 하고 우려한다. 하지만 법원 앞에서 열린 문화제를 지켜보며 말하기의 힘을 다시 한번 체감했다. 참가자들의 자유발언은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털어놓는 ‘미투’와 앞으로도 피해자와 연대하겠다는 ‘위드유’로 이어졌다. 광장에 나오기를 그만두기에는 여전히 말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불법촬영 범죄와 웹하드 산업 사이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았고, 초소형 몰래카메라는 지금도 유통되고 있다. 경찰이나 판사들의 성평등 감수성 수준 역시 갈 길이 멀다. 클릭 수 경쟁 앞에서 언론의 성폭력 보도 가이드라인은 쉽게 무시된다.
“하고 싶은 말은 꼭 하고야 말 거요”
이번 사건에서 재판부가 상대방의 명시적이고 적극적인 성관계 동의 의사가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 강간으로 처벌하는 체계(Yes Means Yes rule)의 부재를 지적하는 등 현행 법체계의 한계를 밝힌 이상, 입법부도 새로운 논의가 필요하다.
계절이 몇 번 더 바뀌어도 우리는 여전히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요구를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쉽게 지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27년 전, 김학순 할머니가 세상에 외쳤던 이 말을 기억하면서. “하고 싶은 말은 꼭 하고야 말 거요. 언제든지 하고야 말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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