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녀가 있었다. 예쁘고 착하고 노래를 잘했다. 인기 많은 게 당연했다. 많은 남자들이 구애를 했는데 하필 제일 나쁜 남자를 선택했다. 잘해보려고 애썼지만 상황은 오히려 더 나빠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게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인생. 더 이상 예쁘지도 않고 노래도 잘하지 못하면서 바보같이 계속 착하기만 한 여자. 사람들은 그를 혐오했고, 그래서 그는 외로워졌다. 다시 한번 힘을 내어 재기의 기회를 잡으려 한 순간이 삶의 마지막 순간이 되고 말았다. 결국 아무도 없는 곳에서 외롭게, 혼자서 그렇게,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일본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2006) 이야기다. 다큐멘터리 〈휘트니〉를 본 뒤 제일 먼저 떠올린 영화다. ‘혐오스런 휘트니의 일생’으로 제목을 지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이야기.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에서 ‘모두가 혐오하는 인간’으로 잊혀져간 가수의 일생. 마츠코를 지켜볼 때처럼 내내 안쓰럽고 안타까웠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볼 때처럼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휘트니〉 역시, 너무나 슬픈 이야기를 너무도 멋진 만듦새로 만들어낸 덕분이다.
감독 케빈 맥도널드는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을 다룬 영화 〈라스트 킹〉(2006)을 연출했다. 배우 포리스트 휘터커가 36년 연기 생활 동안 받은 오스카상은 이 영화로 받은 남우주연상이 유일하다. 극영화를 찍기 전 그는 이미 유명한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는데, 레게의 전설 밥 말리를 다룬 작품 〈말리〉(2012)가 특히 돋보였다. ‘음악 다큐’를 잘 만들고 ‘전기 영화’로 박수받은 그가 ‘음악 전기 다큐멘터리’ 〈휘트니〉의 연출을 맡았다. 불운한 말년을 살다 간 휘트니 휴스턴에게 뒤늦게 찾아온, 연착된 행운이었다.
그의 전성기를 차근차근 되짚어가는 영화는, 수많은 미공개 영상으로 고단했던 백스테이지를 보여주는 일에도 공을 들인다. 특히 영화 〈보디가드〉 주제곡 ‘I Will Always Love You’를 부르는 두 번의 공연 장면에서 나는 아직 헤어나오지 못했다.
불 꺼진 극장에 남아 혼자 속삭이던 말
먼저, 넬슨 만델라의 어깨에 기대어 눈물을 터뜨린 휘트니가 잠시 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한복판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수천 수만명의 흑인 청중을 위로하는 그 장면! 그로부터 아주 많은 세월이 흐른 뒤의 어느 공연장. 마약으로 망가진 몸과 이혼으로 상처 입은 마음을 쥐어짜며 같은 노래를 부르는 장면. 차라리 들키지 않으면 좋았을 휘트니의 처절한 몰락. 그곳의 청중은 모두 그를 비웃고 있었지만, 나는 그 비웃음이 너무 서글퍼서 결국 울고 말았다.
〈휘트니〉는 그런 영화다. 가장 가슴 벅찬 순간은 휘트니 휴스턴이 노래할 때. 가장 가슴 아픈 순간 역시 휘트니 휴스턴이 노래할 때. 어떤 노래엔 미소 짓다가 또 어떤 노래엔 눈물짓는다. 그에게 미안해서 울고 그의 노래가 고마워서 웃는다. 그러다 마침내 불 꺼진 극장에 남아 혼자 속삭이고 마는 것이다. R.I.P. Whitney. I will always lov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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