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지금도 흥얼거릴 수 있는 북한 노래가 몇 곡 있어. ‘평양 축전’에 관한 노래. 평양 축전이 뭐냐고? 남북이 정치·외교·스포츠·경제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사생결단을 불사해온 건 아빠가 여러 번 얘기해줬지? 하지만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체제 경쟁의 저울은 현격하게 남쪽으로 기울었어. 1988년 서울올림픽은 일종의 마무리 펀치 같은 충격을 가져다줬지. 서울 올림픽은 역대 최다 국가가 참석한 지구촌 잔치로 열렸고 한국의 위상은 그만큼 높아졌어.  

북한은 배가 아팠지. 서울올림픽에 대응하기 위해 뭔가를 보여야 했어. 그래서 북한이 발 벗고 나선 게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평양 축전)’이야. 1945년 영국에서 처음 열린 뒤 국제 좌익, 공산 계열 국가의 주도로 열어온 행사였는데 북한은 이 행사를 ‘사상 최대 규모’로 열기 위해 전력투구했어. 15만명을 수용하는 5·1 능라도 스타디움, 평양국제영화회관, 동평양대극장, 평양교예극장, 양각도축구경기장, 평양국제통신센터, 만경대소년학생궁전 등이 평양 축전을 앞두고 지어졌으니 북한으로서는 엄청난 무리를 한 셈이지.

북한은 남한의 대학생들에게도 손을 내밀었어. 당시 학생운동의 대표 조직이라 할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에 평양 축전 참석을 제안해왔으니까. 남한 정부는 처음에는 축전 참가를 수용할 듯 보였지만 결국 “북한 정치 선전에 이용될 우려”를 내세우며 평양 축전 참가를 불허했지. 당연히 전대협은 반발했고 축전 준비 행사 강행은 물론이고 기어이 대표를 북한에 파견하겠다고 선언했어.

그 와중에 각 대학교에서는 북한 노래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울려 퍼졌단다. 서강대학교의 경우 축제 기간에 교내를 아예 평양 시내로 꾸미기도 했다. “아침은 넘치어라 평양 하늘에 산 넘고 바다 건너 우리는 왔네(‘축전의 노래’ 중).”

1989년 6월29일, 한양대에서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평양 축전 결사 참가 백만학도 결의대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별안간 임종석 전대협 의장(현 대통령 비서실장)이 집회 진행을 중단시키고 단상 위에 올랐다. 상기된 표정으로 그는 화급히 성명서를 읽기 시작했지. 듣고 있던 사람들의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졌어. 당시 현장에 있던 아빠 친구의 증언으로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충격”이었지. 내용인즉슨 전대협은 한국외대 임수경 학생을 평양 축전 전대협 대표로 평양에 파견했으며 내일 평양에 도착할 것이라는 ‘폭탄선언’이었어. 폭탄도 그냥 폭탄이 아니라 원자폭탄급.

이튿날인 6월30일 오후 이 ‘원자폭탄’은 정말로 섬광을 발산하며 버섯구름으로 남한 전체를 뒤덮게 돼. 폭발의 진원지는 평양의 순안공항. 앳된 기가 가시지 않은 남한 여대생이 마이크 앞에서 또랑또랑한 서울 말씨로, 가끔씩 배어나오는 ‘운동권 사투리’로 부르짖는 모습이 뉴스에 등장했지. “전대협은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전대협은 평양 축전에 참가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과 북의 청년 학생들이 하나가 되어 반드시, 반드시 조국 통일을 이루고야 말 것입니다.”    

한국 사회는 크게 요동쳤어. 소설가 이문열은 “미친 계집애”라고 비난했지만 당시 옥중에 있던 문익환 목사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꽃”이라며 감격해했다. 그 저주 섞인 욕설과 감격적인 찬사 사이에서 한국 사회는 말할 수 없이 들끓었단다. 임수경은 그대로 하나의 아이콘이 됐어. 그녀가 남긴 성명이나 평상시 언행은 실시간으로 대자보에 담겨 대학 곳곳에 붙여졌지. 조금 민망하게도 임수경과 그 연인과의 생생한 대화, 심지어 함께 테트리스 게임을 하던 이야기가 담긴 일기장까지 “전대협의 대표 임수경의 일면”으로 공개 회람되어 대자보로 게시됐단다.  

북한 학생 100여 명 판문점서 동조 단식

그 충격은 북한도 마찬가지였어. 나이 스물 갓 넘은 남조선 여대생의 행동 하나 하나에 북한 인민들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녀의 손 한번 잡아보자고 몰려드는 인파는 그 지엄한 북한 당국의 통제선을 무너뜨렸어. “우리 인민들이 이렇게 말을 안 들은 적이 없다”라고 사회 안전원(경찰관)이 입을 벌릴 정도였다고 해.

임수경은 북한에서도 하나의 의미 있는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어. 김일성 주석이 준 선물을 깜박 두고 나오는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르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 북한 관계자들을 기절초풍시킨 여학생, 북한 측의 무리한 요구에는 거침없이 고개를 저어 끝내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는 당돌한 남한 여대생에게 북한 2000만 인구가 집중했지. 북한 사람들은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거야. “야 남조선 처자레 우리가 생각했던 거하곤 좀 다르단!”

일례로 아빠가 만났던 한 탈북자 아주머니는 이런 얘기도 했다. “우리끼리 토론도 하고 그랬어요. 쟈는 도대체 옷을 몇 벌 개지고 온 거가.” 단지 임수경에 대한 생각을 넘어서서 임수경의 나라, 즉 ‘승냥이 미제의 지배 아래 신음하는 남조선’이 자신들의 생각이나 북한 당국이 가르쳐온 것과는 뭔가 다르다는 수군거림도 퍼져 나갔어. 탈북자 출신의 주성하 〈동아일보〉 기자는 “북한 주민들의 정신적 해방에 큰 기여를 한 공로자”라고 표현하기도 했지.

그녀가 북한 사람들을 가장 격동시킨 장소가 바로 판문점이었어. 임수경은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판문점을 통해 돌아가겠다”라고 선언했단다. 원래는 한국전쟁 휴전협정일인 7월27일을 기해 판문점을 거쳐 남쪽으로 오려 했으나 한국 정부는 이를 거부했지. 입장이 난처해진 북한도 제3국을 통해 돌아가라고 권유해봤지만 임수경은 막무가내였어. “죽어도 판문점을 넘어가겠어요.” 단식을 시작했다. 판문점 북측 지역에서는 난리가 났어. 북한 학생 100여 명이 동조 단식을 벌였고, 북한 당국은 몰려드는 동조 단식 희망자들을 통제하느라 애를 먹어야 했어. 남으로 가겠다는 임수경 앞에서 북한 사람들은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했단다. 

ⓒ연합뉴스1989년 8월15일 임수경씨(가운데 왼쪽에서 세 번째)가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좀 특이했어. 북한 사람들은 임수경이 남쪽으로 오면 ‘반드시’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 즉 임수경이 삶을 버리고 죽음을 향해 자진해서 행진하는 거룩한 성녀처럼 보였던 거야. 만약 북한 대학생이 올림픽이 열리는 남한에 밀입국해 잠실 종합운동장에서 “조국은 하나다”를 부르짖은 후 북쪽으로 올라왔다면 무슨 일을 당할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가톨릭 신자인 임양을 보호하고 통일에 대한 열망을 확고히 하기 위해” 문규현 신부를 북한으로 파견한단다. 죽어도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겠다던 임수경은 문규현 신부의 손을 잡고, 눈물로 전송하는 북한 학생들에게 거듭 거듭 손을 흔들며 판문점의 높이 5㎝ ‘장벽’을 훌쩍 넘어 남쪽으로 돌아왔어. 그녀는 분단 이후 최초로 판문점을 통해 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민간인으로 기록됐지.

임수경의 방북에 대해서는 지금도 이런저런 논란이 많고 ‘통일의 꽃’부터 ‘빨갱이 ×’까지 극단적인 평가가 존재해. 하지만 역사는 뜻하지 않은 계기를 통해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결과를 생산하는 심술을 부리곤 하지. 임수경의 방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그녀는 그때껏 견고하게 버텨온 남과 북 모두의 편견의 장벽에 구멍을 냈어. 판문점에서 “조국은 하나다”를 외쳤던 임수경(북한 당국은 ‘조선은 하나다’를 권했지만 임수경은 끝까지 ‘조국’을 고집했다). 2018년 남북 정상회담 전까지 판문점 역사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한국인 중의 하나였다. 그녀와 아빠가 함께 불렀음직한 노래를 흥얼거려본다. “갈라져 몇 해더냐 헤어져 몇 해더냐. 겨레여 나서라 통일의 한 길로 조국은 하나다(‘조국은 하나다’ 중에서).”

기자명 김형민(SBS CNBC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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