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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국 간 통화스와프 체결이 내리꽂히던 주가와 치솟던 환율만 거꾸로 돌린 것이 아니다. 사람의 거취도 되돌리는 위력을 발휘한 듯하다. 수혜자는 사퇴 압력을 받아오던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강 장관은 지난 몇 개월간 줄곧 경질론에 시달려왔고, 갈수록 압박의 수위가 높아져 사지로 몰렸지만, 일단 그 위험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통화스와프 체결 소식이 알려진 시점은 10월29일 오후 늦게다. 이보다 앞서 당·청에서는 강 장관 거취에 대한 언급이 집중 이루어졌다. 이날 오후 이동관 대변인은 “현재로서는 (강 장관 거취와 관련한)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 게 없다”라고 밝혔다. 유임이라는 대통령의 뜻이 바뀐 게 없다는 뜻이다. 이날 오전에 열린 한나라당 최고위원·중진 의원 연석회의에서도 유임으로 의견을 정리했다고 한다. 여당 내에서조차 경질론이 승해지던 시점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10월29일 주식시장의 모습이다. 강 장관은 공교롭게 그날 아침 총리 주재 회의와 국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유가 경질 임박으로 알려져 주가가 파죽지세로 올랐는데, 오후 1시께부터 거꾸로 내리꽂히기 시작한 것은 유임으로 돌변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나돈 것이다. 물론 이날 상승장을 하락장으로 돌변하게 한 실제 이유는 C&그룹 파산 위기였고 강 장관의 회의 불참 사유도 일어나기조차 어려운 극도의 몸살 때문이었지만, 강 장관 거취가 그만큼 시장 참여자 사이에 민감한 이슈라는 방증이다.

임명권자의 직접 언급도 나왔다. 10월30일 이명박 대통령은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8차 회의에 앞서 참석자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강 장관이 미국에 가서 재무장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등과 얘기를 잘 한 것 같다”라고 말한 것이다. 사실상 신임 발언이다. 다음날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열린 고위당정회의에서는 그에 대한 기류가 확 바뀌었다. “통화스와프 체결에 강만수 장관이 수고해줘 감사하다”라는 한승수 총리의 칭찬은 그렇다 쳐도 고작 며칠 전에 ‘이헌재 같은 카리스마를 가진 분이’를 언급했던 홍준표 원내대표도 “그동안 강 장관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라며 엄호 대열에 가세한 것이다.

이로써 강 장관을 둘러싼 거취 논란은 당분간 잠잠해지리라 보이지만, 그렇다고 여진이 없을 것 같지는 않다. 당장 야당의 반발이 거세다.  10월30일 민주당은 “국민의 퇴장 명령을 받은 강만수 장관에 대한 대통령의 칭찬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라며, 눈과 귀를 의심하게 하는 폭탄 발언이라고 맹비난하는 성명을 냈다.

같은 날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는 더욱 수위를 높였다. 이 총재는 국회 대표 연설에서 “강만수 경제팀이 외국의 금융기관과 언론, 국내 시장의 신뢰를 잃은 지 오래돼 정부가 어떤 정책을 발표해도 백약이 무효처럼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라며 경제팀을 경질한 후에 거국 경제내각을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시사IN 한향란여당 정치인에 의해 돌연 거론된 이헌재 전 장관.
‘전투 중에는 장수를 바꾸지 않아야 한다’는 전날 여당 대표의 주장을 의식한 듯 이 총재는 “이기는 장수를 말하는 것이지 패장도 바꾸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받아치기도 했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는 10월30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불(금융위기)이 났으면 불부터 끄고 그 다음에 책임을 따져도 따져야 한다. 이것이 한나라당의 기본 입장이다”라며 경제팀 교체에 대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시장 신뢰 잃은 이는 경제회생 못 시킨다”

이것은, 금융위기라는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이 와중에 장수를 말에서 끌어내리는 것은 ‘전투력’을 손상시킬 뿐이라는 청와대 논리와 맥락이 같다. 청와대가 강만수팀 고수를 굽히지 않는 데는 다른 이유도 적지 않다는 것이 여당과 정부에서 나오는 얘기다. 우선 한 달여 업무 공백에 대한 염려다. 인사 청문회 등으로 공백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데, 위기의 와중에 낙마시키는 것은 나라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 장관을 물러나게 한다면 야당의 공세에 무릎을 꿇는 셈이고, 이것이 연쇄적인 경질 압박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는 정치적 이유를 드는 이도 있다. 후임 인물이 마땅하지 않다는 점도 유임을 고수하는 이유로 거론된다.

 청와대로서는 이런 여러 이유로 힘겹게 강만수팀 유지를 고수하는 상황에서 통화스와프 체결이라는, 경질론을 잠재울 특급 호재가 터진 것이다. 때 맞춰 나온 유가 하락 등의 영향으로 10월 경상수지가 10억 달러 이상 흑자를 기록하리라는 예상도 강 장관에게는 좋은 신호다. 이런 요인들과 대통령과 강 장관 사이의 신뢰 관계로 인해 현 체제 유지로 귀결되는 듯하지만, 경질론이 다시 튀어나오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한 증권사 분석가는 “당분간 잠잠하겠지만 다시 들끓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근거로 강 장관 경질론의 수위가 워낙 높고 그를 바꾸라고 요구하는 대상이 폭넓다는 점을 든다.

야당 정치인과 전직 대통령을 빼더라도 학계와 시민단체 등에서 줄곧 그의 경질을 주장해온 것은 사실이다. 지난 7월 경제·경영학자 118명이 기자회견을 했고, 10월 들어 경실련이 성명서를 낸 것이 좋은 예다. 시장 관계자 사이에서도 그를 옹호하는 인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보수 성향인 주류 경제학자들도 별로 다르지 않다.

10월28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의원들 앞에서 강 장관은 이런 말을 했다. “장관 취임 후 하루도 쉬지 않고 조국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 생각하고 열심히 일해왔다. 온몸으로 파도에 부딪히면서 일해왔다.” 성실하고 강직한 그의 성정으로 볼 때 이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이 자리에서 그는 “지금까지 진퇴를 분명히 하는 인생을 살아왔다. 사랑의 채찍은 사람을 분발하게 만들지만 미움의 매는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파멸하게 만든다고 배웠다”라고도 말했다. 재정부 관계자 말처럼, 극심한 스트레스가 최근 그의 마음과 몸을 아프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상당수 경제 주체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는 외환시장 개입 과정이나 금융위기 수습 과정에서 패착이 적지 않았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개입 방식이 적절하거나 세련되지 않아 혼란을 야기하거나 되레 위기를 부추겼다는 질타에 시달려온 것이다. 미국과의 통화스와프 체결 성사에 그의 기여가 큰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이것이 그에 대한 평가를 되돌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한 경제학자는 “그는 억울할지 몰라도 중요한 것은 시장이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특히 정부가 국민에게 고통 분담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에서 경제팀 수장으로서의 리더십 부재는 경제를 회생시키는 데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했다.

과천 관가에서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대 위기라는 엄혹한 상황에서 누가 경제 수장이 되든 강 장관과 별반 다를 것이 없으리라는 동정론도 나오지만, 현 체제가 그리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아예 당·청 지도부가 교체 시기를 연말 혹은 연초로 합의했다는 추측까지 나돈다. 당·청 지도부는 일단 금융위기라는 급한 불을 끈 뒤, 자연스럽게 경제팀 개편을 포함한 2기 내각을 선보이면서 MB노믹스를 본격 추진할 동력을 확보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 국면을 강만수 경제팀 유임 혹은 재신임이라기보다 ‘유보’로 해석해야 하는 셈이다.

기자명 장영희 전문기자 다른기사 보기 coo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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