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의 성난 외침이 연일 서울 도심의 하늘을 가득 메웠다. 5월17일에는 강남역 살인 사건 2주기를 맞아 서울 지하철 7호선 신논현역 인근에서 성차별·성폭력 반대 시위가 열렸다. 폭우 속에서도 1000명(이하 경찰 추산 인원)이 모여들었다. 이어 5월19일에는 불법 촬영 범죄에 경찰이 공정하고 엄격하게 수사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집회가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부근에서 개최됐다. 1만명이 넘게 참가해 규모 면에서 역대 여성 집회 기록을 새로 썼다. 다음 날인 5월20일에는 서울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근처에서 임신중절 합법화를 지지하는 여성 1000명이 모였다. 이들은 5월24일 ‘낙태죄’ 위헌 여부를 가리는 헌법재판소 공개 변론을 앞두고, 국가가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 차례 시위 모두 당초 경찰이나 주최 측 예상을 뛰어넘는 참가자가 몰렸다. 하지만 또 다른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염산 테러’ 위협이었다. 염산을 구입했다고 인터넷에 올린 사진이 거짓임이 드러났지만 참가자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구급약이 준비됐고, 길가에 서 있는 참가자에게는 안쪽에 와서 앉으라고 자리를 내어줬다. 화장실에 갈 때도 되도록 여럿이 함께 이동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5월17일 시위에서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당초 예정된 행진 코스를 변경하기도 했다.
시위 참가자들을 무단으로 촬영해서 실랑이가 벌어지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촛불집회 등 이미 수많은 시위에서 예쁘면 예쁜 대로, 예쁘지 않으면 예쁘지 않은 대로 여성 참가자 사진은 품평의 대상이 되어왔다. 불법 촬영이 명백한 범죄임을 경고하는 집회에서조차 아무런 자각 없이 타인의 얼굴과 신체를 촬영하는 사람, 그리고 시위 참가자들의 외모를 평가하고 싶어서 인터넷을 뒤지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이들에게 ‘영웅’으로 등극하고 싶었을까. 5월19일 혜화역 집회에서는 〈스파이더맨〉 〈데드풀〉 등 히어로 무비의 주인공 차림을 한 남성 몇몇이 나타났다. 이들은 시위 현장을 인터넷에 생중계하거나 페미니즘을 폄하하는 피켓을 들었다가 제지를 받았다. 여성에게 쏟아지는 2차 가해를 뻔히 알면서도 성폭력 피해자나 시위 참가자들에게 “떳떳하면 얼굴을 공개하라”며 손쉽게 키보드를 두들기던 이들의 실체란 고작 이런 것이다. 자신은 남을 관음하고 품평할 자격이 있다고 믿지만, 반대로 자신이 대상이 되는 것은 극히 두려워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인터넷 커뮤니티 안에서 추앙받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결국은 가면 뒤에 숨는 방법을 택한다. 자신을 가리고 나타난 이들은 시선 또한 권력이라는 점을 명백히 알고, 그 비대칭성을 악용한다는 점에서 불법 촬영 범죄자들과 비슷한 생각을 공유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냉장고’를 박차고 거리로 나온 여성들
영웅 서사의 진부함을 꼬집는 ‘냉장고 속의 여자(Women in refrigerator)’라는 용어가 있다. 1990년대 히어로 코믹스인 〈그린 랜턴〉에서 악당에게 토막 살해당해 냉장고에 버려진 여자 친구의 시체를 보고, 주인공이 각성하여 악당을 무찌른다는 내용에서 유래했다. 여성 캐릭터를 남성 캐릭터의 성장을 위한 보조적 도구 역할, 또는 잔혹하게 희생당하는 피해자 역할에만 묶어놓는 이야기 구조를 비판하는 용어다. 히어로 무비의 주인공 가면 뒤에 숨은 이들에게도 시위에 참가한 여성들은 ‘냉장고 안에 있어야 할 존재’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현실의 여성들은 거리로 나왔다. 자신과 동료 여성들의 생존을, 존엄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외친다. 그렇다면 진짜 영웅의 자리에 어울리는 쪽은 누구겠는가. 돈만 주면 누구나 사서 쓰는 가면이라지만 그들은 영웅의 가면조차 쓸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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