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라는 거대한 섬나라에 와서 또 섬으로 들어가야 하다니….’

사이키(佐伯) 시 항구에서 페리호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 스쳐간 생각이다. 사이키 시는 일본 규슈 오이타 현의 남동부 중심 도시다. 오이타 현에는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벳푸 온천, 유후인 온천 등이 있다. 오이타 현에서도 가장 면적이 큰 도시가 바로 사이키 시다. 그러나 인구는 불과 7만명 남짓. 한때 30만명에 달했던 인구가 일자리 감소와 더불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이제는 도시라는 말조차 무색해졌다.

규슈올레 20번째 코스가 생긴 오뉴지마(大入島)는 사이키 시에서도 15분가량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이다. 사이키 항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섬과 육지를 잇는 다리가 없다. “여러 차례 다리를 놓아달라고 시에 요청했지만 예산이 배정되지 않았다”라고 섬 주민 간베 다카마사 씨(62)는 말했다.

ⓒ시사IN 김은남규슈올레는 올레 정신에 입각해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길로 나 있다. 위는 지쿠호·가와라 코스에서 만난 규슈 아이들과 반갑게 인사하는 올레꾼들.
인간사 역시 새옹지마다. 다리가 놓이지 않은 덕분에 오늘날 이 섬을 찾는 여행자들이 생겨났단다. 육지의 번잡함을 피해서다. 오뉴지마에는 이들을 위해 섬을 일주할 수 있는 자전거도로가 놓여 있다. 도로 길이 약 17㎞. 자전거로
약 1시간30분 걸린다.

여기에 이번에는 걷는 길이 추가된 것이다(정식 명칭은 ‘사이키·오뉴지마 코스’). 올해 개장한 사이키·오뉴지마 코스와 지쿠호·가와라 코스를 더하면 지난 6년간 규슈 내 7개 현에 생긴 규슈올레는 모두 21개(243.1㎞)에 달한다. 이 중 섬에 규슈올레가 생긴 것은 이번이 두 번째. 2014년 후쿠오카 현에 생긴 무나카타·오시마 코스에 이어서다.

규슈올레가 처음 생긴 것은 2012년. 기존 단체 관광객이 아닌 새로운 여행자 층을 유입하고 싶었던 규슈관광추진기구가 제주올레 브랜드를 수입하면서다. 지난 6년간 코스를 새로 낼 때마다 심사를 담당한 안은주 제주올레 상임이사는 크게 세 가지를 기준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새길 대신 옛길을 살려내려 노력했나, 자연풍광 외에 사람 사는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했나, 환경파괴와 동식물 피해를 최소화했나가 그것이다. 제주올레가 생겨난 정신에 입각한 심사 기준이었다.

이 같은 기준을 접한 지역 공무원과 주민들은 고민에 빠졌다. 자전거도로를 포함해 섬길 대부분이 포장된 도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섬에서 평생을 산 노인들이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옛날에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걸어 다니던 산길이 있었는데….” 노인들의 말을 듣자마자 섬 탐사에 나선 공무원들은 쾌재를 불렀다고 한다. 섬 남동부에 있는 오뉴지마 초등학교. 섬에 유일하게 있던 이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아이들이 통학하던 산길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시사IN 김은남해안에서 쑥 들어와 있어 폭풍이 칠 때 배를 숨긴다는 후나카쿠시(船隱). 사이키·오뉴지마 코스 초입에 있다.

이렇게 찾아낸 옛길을 이은 것이 사이키·오뉴지마 올레길이다. 오뉴지마는 표주박을 거꾸로 세워놓은 것처럼 생겼는데, 표주박 한가운데 오목한 부분에서부터 올레길이 시작된다. 이름하여 캥거루광장이다(광장 중앙에 오스트레일리아와 자매결연을 맺으면서 세웠다는 캥거루 동상이 있다). 이곳에서 시작해 표주박 손잡이 부분(섬 북부)을 한 바퀴 걷고 광장으로 돌아온 다음, 다시 표주박 주둥이 부분(섬 남부)을 한 바퀴 돌아오기까지 거리가 10.5㎞. 걷다 보면 마을길과 농장길, 바닷길, 숲길이 번갈아 나타난다.

안내서에 따르면 코스를 완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3~4시간. 그런데 한눈팔기 좋아하는 여행자라면 이 시간을 훌쩍 넘기기 십상이다. 출발 지점을 1.5㎞ 지나 등장한 후나카쿠시에서부터 발걸음이 느려진다. 후나카쿠시는 바다가 육지로 쑥 휘어져 들어간 만(灣)의 이름이다. 바람 없는 온화한 날이면 해수면에 거울처럼 산 그림자와 구름이 비친다고 한다. 만을 가로질러 바다 위로 난 둑길도 한 폭의 그림 같다. 쌍방향은 불가능하고 일방으로 한 사람만 건널 수 있는, 이름 그대로 ‘바다의 작은 길’이다.

해안길을 지나 마을길을 걷다 보면 담 너머 마당 안에서 주름진 얼굴로 손을 흔드는 노인들이 보인다. 한때 5000여 명에 달했다가 지금은 700명 남짓 남았다는 이 섬 주민 대부분이 60대 이상 고령자다. 개중에는 사람 귀한 이 섬에 여행자가 찾아온 것을 반가워하며 자기가 기른 감귤류를 인심 좋게 나눠주는 노인들도 있다. 이름이 ‘뽕깡’이라는데, 한입 베어 무니 새콤하면서 단맛이 강하게 느껴지는 게 제주의 천혜향과 비슷하다.

20분 걸어 덴코 산 전망대에서 마주한 풍경

감귤로 기운을 얻었다면 이제 산길에 도전할 차례다. 섬 북부에는 덴코 산이 있다. 산 아래부터 전망대까지 오르는 데 약 20분이 걸린다. 비록 숨도 차고 다리는 후들거리겠지만, 덴코 산 전망대에서 360°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전경이 그간의 노고를 잊게 해준다.

그런가 하면 섬 남부에는 도오미 산이 있다. 덴코 산이나 도오미 산이나 둘 다 해발 200m급 높지 않은 산이지만, 평소 산을 즐기지 않거나 심장이 약한 사람에게는 버거울 수도 있다. 섬 남부에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B코스가 따로 준비돼 있다. 도오미 산으로 난 A코스 대신 해안을 따라 걷는 길이다. 다만, 섬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는 A코스에만 있다. A코스를 선택해 도오미 산 정상에 오르면 학교가 파해 집으로 가던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신나게 놀았음직한 평지가 펼쳐져 있다. 이곳에 마련된 나무그네에 걸터앉아 사이키 만과 푸른 바다를 질릴 때까지 바라보는 것 또한 A코스를 선택한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다.

산길을 내려온 뒤 올레 코스를 살짝 벗어나 초등학교로 향한다. ‘도대체 어떤 학교였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쓸쓸한 폐교를 상상하고 갔다가 깜짝 놀랐다. 수영장까지 딸려 있는 제법 큰 규모의 학교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섬에 포장도로가 생긴 뒤 아이들은 버스로 이 학교를 오갔다고 한다. 덕분에 산길은 조용히 잊혔다. 그러나 이제는 학교 또한 산길과 같은 경로를 밟을 판이다. 간베 다카마사 씨는 “학생 수 부족으로 학교가 작년에 문을 닫았다”라고 말했다.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난 이들에게는 올레길이 한 가닥 위안이자 희망이었을까. “신칸센이 지나가는 규슈 서부와 달리 사이키·오뉴지마가 있는 일본 동부는 쳐다보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규슈올레를 통해 리아스식 해안 등 절경이 숨어 있는 이 지역만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다”라고 하시모토 마사에 사이키 시 관광협회장은 말했다.

단, 하카타 역이나 미야자키 역에서 사이키 시를 오가는 JR 열차가 있다고는 하지만 알려진 관광지에 비해 교통이 불편하고, 오뉴지마 섬 내에 식당이나 호텔 등 편의 시설이 없는 것은 이 코스의 최대 약점이라 할 만하다(자세한 코스 안내는 규슈관광추진기구 홈페이지를 참조할 것).





두 기차역 사이 올레길


ⓒ시사IN 김은남사이키·오뉴지마 코스에서 만나는 하늘전망대. 섬을 둘러싼 바다 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규슈올레 사이키·오뉴지마 코스에 이어 21번째로 개장한 지쿠호(筑豊)· 가와라(香春) 코스는 오래된 기찻길이 눈에 밟히는 올레길이다. 길의 시작점부터가 오래된 기차역인 ‘JR 사이도쇼 역’이다. 근대 목조 양식 건축물인 이 역은 그 자체로 볼거리다. 역사 주변 풍광은 흡사 일본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단아하고 평화롭다.

11.8㎞에 이르는 올레길 또한 기찻길을 넘나드는 형태로 구성돼 있다. 코스 전반부에서는 이 지역의 자연을 느낄 수 있다. 사이도쇼 역 뒤쪽에 자리 잡은 산을 올라 표고 304m 지점 ‘야야마의 언덕’까지 이르는 데 50분가량이 걸린다. 대나무·삼나무·잡목이 교대로 나타나며 박력 있는 장관을 보여준다.

지쿠호·가와라 지역은 구리 산지로 유명했다. 사이도쇼라는 역 이름이 한자로 ‘채동소(採銅所)’인 이유도 그래서다. 오이타 현에 있는 우사 신궁의 동경(銅鏡)과 나라 지역 대불(大佛) 등이 이곳에서 난 구리로 주조됐다고 한다. 그러다 에도막부 말기 들어 석탄 채굴지로 변신했던 이 지역은 오늘날 시멘트 원료인 석회암 채굴지로 재변신한 상태다. 

다시 기찻길을 따라 걷게 되는 코스 후반부는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갈린다. 후반부 코스의 정점인 가와라 신사까지 아스팔트 길이 5㎞ 남짓 다소 지루하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신사는 독특하게도 신라의 신을 모신다. 8세기께 신라에서 건너와 구리 제련 기술을 이 지역 사람들에게 전파했다는 ‘가라쿠니 오키나가 오히메 오메(辛國息長大姬大目)’가 그 대상이다. 

아스팔트 길이 지루하다면 코스 중간에 있는 오래된 라면 가게나 양과자점에 들러 잠시 쉬어가도 된다. 기차역(JR 사이도쇼 역)에서 시작된 길은 기차역(JR 가와라 역)에서 끝난다. 


※ 이 취재는 규슈관광추진기구의 지원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기자명 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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