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레이코프는 원래 변형생성문법 이론으로 언어학계를 평정한 놈 촘스키의 제자였으나, 독립적으로 인지언어학을 개발하면서 스승의 거의 모든 이론과 대립하게 된다. 두 사람은 언어학계 안에서는 숙적이지만, 미국 정치 현실에 적극 개입하는 비판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촘스키가 무정부주의적이고 레이코프가 미국 민주당을 지원하는 전략가라는 점이 다르긴 하지만, 두 사람은 미국 안팎에서 활동하는 진보주의자들의 강력한 우군이다.
언어학은 문외한에게 도통 접근을 불허하는 난이도 높은 학문이다. 하지만 언어학자이자 시민운동가로서 레이코프의 특이성은 그의 언어학 이론이 정치담론 분석과 빈틈없이 호응한다는 것이다. 이 점, 촘스키의 정치평론이나 정치적 입장이 그의 언어학 이론(변형생성문법)과 아무런 관련 없이 이루어지는 것과 매우 다르다. 레이코프는 언어학을 형식주의적인 논리의 학문이 아닌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학문으로 만들었다.
진보 정치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레이코프의 정치학 저술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삼인, 2006), 〈프레임 전쟁〉 (창비, 2007), 〈폴리티컬 마인드〉(한울, 2014) 가운데 어느 한 권을 한 번쯤 손에 들었을 법하다. 레이코프가 이 책들을 쓴 이유는, 진보 진영을 끈질기게 괴롭혀온 오래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였다.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모든 나라의 부를 상위 2%가 독차지하고 있는 게 맞다면, 복지정책을 확대하겠다는 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그런 기대를 배반하기 일쑤다. 레이코프와 엘리자베스 웨흘링의 대담집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 (생각정원, 2018)와 이 책을 번역한 나익주의 〈조지 레이코프〉 (커뮤니케이션스북스, 2017)는 저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는 이들을 위한 훌륭한 입문서다.
레이코프가 인지언어학에서 이룬 업적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은유(隱喩·metaphor)’를 새로 정의한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2000년 넘게 서구 학계는 은유를 시인과 같은 특출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들이 구사하는 ‘표현력’이나 ‘상상력’으로 간주해왔다. 이에 따르면 은유는 뛰어난 언어 기교를 탁마한 이가 구사하는 언어적 장식이며, 따라서 은유는 인간의 언어생활에서 반드시 있지 않으면 안 되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레이코프는 은유는 언어상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인지 과정 자체가 본질상 은유적이며 (은유 없이는 인지가 불가능하다), 은유는 인간의 체험이 축적되어서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탈리아에서 1992년 시작된 공무원 부정부패 청산 운동을 ‘마니 풀리테(Mani Pulite·깨끗한 손)’ 운동이라고 한다. 문학계에 포진한 학자들은 ‘깨끗한 손’을 청렴한 공직 사회를 제유적으로 표현한 그럴싸한 은유라고 설명할 것이다. 그런데 토론토 대학에서 행했던 어느 연구는 ‘도덕성=깨끗함’이 단순한 언어적 기교가 아니라, 인간의 심리와 뇌 속에 구조화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친구에게 거짓말을 했거나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한 적이 있는 실험 참가자들 가운데 절반 이상은 자신의 도덕적 비행을 회상하고 난 뒤에 손을 씻었다. 이들은 손을 씻지 않은 실험 참가자들보다 죄책감을 덜 느끼게 되었으며, 잘못을 뉘우칠 줄 아는 더 깨끗한 양심을 지녔다고 믿었다.
또 가정은 불도 얼음도 아니지만, 행복해 보이는 가정에 ‘따뜻한 가정’이라는 은유가 일상적으로 쓰이는 것도 인간의 체험에서 나왔다. 행복한 가정은 겨울에 난방이 되어 있고, 식지 않은 음식이 있고, 부모의 보살핌이 있다. “내 마음은 호수”라는 시구에서 ‘호수’는 고작 ‘내 마음’이라는 원관념을 장식해주는 보조관념으로 격하되어 있다. 이 위계 속에서 ‘호수’는 부차적이지만, 레이코프는 은유 없이는 본질(‘내 마음’)을 나타낼 수 없다고 말한다.
은유는 언어 이상으로 강력하다
은유는 언어 이상으로 본질적이고 강력하다. 이 때문에 정치는 항상 은유를 동원하는데, 정치적 은유의 대표 형태가 바로 레이코프가 유행시킨 프레임(frame)이다. 단테가 묘사한 지옥문에는 “여기에 들어오는 자 희망을 버려라”고 쓰여 있는데, 레이코프의 프레임 이론 첫 장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사고가 의식적이라고 가정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고, 추정컨대 98%는 완전히 무의식적입니다.” 특히 정치적 판단을 할 때, 유권자는 자신의 이성이 아니라 프레임이 대신 사고한다. 자신의 당면 이익마저도 합리적 판단의 상수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진보(좌파)·보수(우파) 가릴 것 없이 프레임이라는 정치적 은유를 이용한다. 보수의 대표 프레임은 ‘국가는 엄격한 아버지’ 모형이다. 아버지가 도덕적 권위를 가진 것처럼, 국가 역시 도덕적 권위를 갖고 징벌의 권한을 사용해야 한다. 보수가 사형제를 찬성하고 복지에 등한한 이유는, 범죄자와 가난한 이들은 절제력과 노력이 부족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들을 도와주는 것은 그들의 자립 의지를 꺾는 부도덕한 일이다. 반면 진보는 ‘국가는 자애로운 부모’라는 프레임을 내세운다. 이 모형은 토의·설득·협동·신뢰·관용·감정이입을 중시하고, 개인보다 공동체의 가치와 책임에 역점을 둔다. 범죄자와 소외계층에게는 사회의 온정과 지원이 필요하다. 두 프레임은 세금, 전 국민 의료보험, 임신중절, 동성애, 교육, 총기 소유, 외교, 전쟁 등 미국의 모든 정책에서 날카롭게 부딪친다.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는 신자유주의는 ‘국가는 엄격한 아버지’라는 프레임을 성공적으로 확대·정착시켰고, ‘국가는 자애로운 부모’라는 프레임을 낙후시켰다. 이유는 많은 유권자들이 전자를 더 신뢰하면서 후자를 못 미더워한다는 것이다. 진보 진영은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부루퉁하게 말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결코 부자에게 표를 준 게 아니다. 그들은 자신을 구제해줄 ‘강한 아버지 국가’에 좀 더 가까운 정당 혹은 선전(propaganda)에 무의식적으로 끌린다. 인간의 신체와 뇌가 ‘자애로운 부모’보다 ‘엄격한 아버지’ 모형이라는 은유에 더 매료된다면, ‘국가 가정’의 자연스러운 도관(導管) 구실을 하는 자녀 양육 방식에 대해 더 고민해야 할 것이다. 웨흘링의 지적처럼, 인간은 통치를 받는 최초의 주요한 경험을 대부분 어린 시절 가정의 영역에서 하게 되고, 그때의 경험이 올바른 국가 운영 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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