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안희태이건희 전 회장(가운데)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번졌다. 변호사(왼쪽)·비서팀장(오른쪽)과 함께 법정을 나선 그는 항소심 선고가 만족스러운 듯했다.
이건희 전 회장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10월10일 오후 2시50분께 법정을 나서는 그의 표정은 밝았다. 1시간여 전 굳은 얼굴로 법정에 들어설 때와는 영 딴판이었다. 그는 “재판 결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족하느냐”라는 기자 질문에 각각 “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는데…” “잘 모르겠다”라고 답했다. “법원이 선처했다고 보느냐”라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법원을 떠날 때까지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반면 서울고법 417호 대법정 검사석에 홀로 앉아 37분 동안의 재판장 선고를 들었던 윤정석 삼성 특별검사보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했다. 그는 상고 여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조준웅)특검이 결정할 것”이라고 짧게 답하며 법정을 빠져나갔다. 그로부터 3시간여 흐른 오후 6시께 조준웅 특검으로부터 “그런 것이 범죄가 되지 않는다면 무엇이 범죄냐”라고 격하게 반발하며 상고하겠다는 반응이 나왔다.
‘2008노 1841’ 사건, 즉 조준웅 삼성특별검사가 지난 4월 이건희 전 회장 등 총 10명의 삼성 전·현직 경영진을 불구속 기소한 사건 항소심은 이렇듯 기소한 이와 기소당한 이들 간에 명암을 낳았다. ‘이건희가 웃었다’는 말이 판결 직후 법조 출입기자 사이에 물결처럼 퍼져 나갔지만 그렇다고 7월16일 이루어진 1심 선고와 비교할 때 그의 형량이 달라진 것은 전혀 없다. 그는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 서기석 재판부로부터도 1심 민병훈 재판부 때와 같은 ‘징역 3년·집행유예 5년·1100억원 벌금형’을 부과받았다.

하지만 이번 2심 선고에서 그가 얻은 것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는 지난 10년여 자신과 아들을 끈질기게 괴롭혀온 불법 경영권 세습이라는 원죄를 법원에 의해 탕감받았다.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로의 경영권 승계가 도덕적 지탄은 받을지언정 실정법상으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받은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 탓인지 대법원 판결이 남았다고 해도 이건희 부자에게는 장애물이 원천 제거되었다는 반응이 벌써부터 법원 안팎에서 나온다. 

ⓒ시사IN 안희태지난해 10월29일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은 삼성특검을 이끌어냈다. 그는 “한국 주류 사회의 안정성과 견고성을 보여주는 명판결”이라고 비꼬았다.
 이미 삼성 측은 20여 년간 골칫덩어리였던 삼성생명 차명주식 2조3000억원 등 거액의 차명자금을 특검 수사를 계기로 일거에 실명화하는 예기치 않은 성과를 얻었다. 재판부가 이학수·김인주·최광해 피고인에 대해 1880억원대 벌금형을 면제한 것도 예기치 않은 소득이다.
법원이 이미 1심 때부터 삼성의 지배구조와 경영권 세습을 용인하는 경향을 띠었으나 2심 때 훨씬 강해졌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 논거가 사뭇 다르다는 사실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적지 않은 대목에서 원심을 깨는 판결을 내놓았다. 가령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발행의 경우 1심 재판부는 ‘주주 배정’으로 판단했으나 2심 재판부는 이재용 남매라는 제3자에게 발행된 명백한 ‘제3자 배정’이라고 판시한 것이다.

에버랜드 제3자 배정이지만 무죄

그렇다면 회사에는 손해가 없고 기존 주주들 간에 지배력 약화와 주식가치 하락이라는 손해가 발생할 뿐인 주주 배정이어서, 즉 제3자 배정이 아니어서 배임이 아니라는 1심 판단의 근간을 뒤집는 것인데도, 2심 재판부는 똑같이 무죄를 인정했다. 주주 배정이든 제3자 배정이든 상관없이 기존 주주 간 손해가 났을 뿐 회사에는 손해가 생긴 것이 아니므로 배임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른바 ‘주주 손해설’이다. 이에 대해 한 변호사는 “법인격을 가진 회사가 손해를 보는 게 아니라는 견해는 배임죄의 법리나 대표이사 등의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의무에 관한 법 해석을 일거에 무력화시킨다”라고 비판했다.

2심 재판부는 에버랜드전환사채 헐값 발행과 함께 경영권 불법 승계와 관련된 삼성SDS 신주인수권부 사채 저가발행 사건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를 적용했다. 1심 재판부는 제3자 배정이므로 배임죄가 성립하지만, 특검이 제시한 적정 가격을 인정할 수 없다며 상속증여세법 보충 방법을 재판부 직권으로 적용했다. 이 방법으로 산정할 때 회사 손해액이 50억원을 넘지 않아 특경가법상 공소시효(10년)를 적용할 수 없고 일반 시효(7년)를 적용해야 하는데 그 기간이 지났으므로 ‘면소’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2심 재판부는 이 사건 사채 발행 무렵의 거래 사례에 의한 주가 5만5000원은 객관적인 교환가치를 적정하게 반영한 것으로 정상 가격이 명백함에도 원심이 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사실 오인 및 법리 오해의 위법을 범한 것이라고 원심을 간단히 깨뜨렸다. 보충적 평가 방법이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도 내놓았다. 이것은 그동안 경제개혁연대 등 시민단체가 줄기차게 주장한 것이고 특검 측 논리와도 부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1심 때보다도 삼성 측에 유리했다. 면소가 아닌 무죄다. 2심 재판부가 삼성SDS에 대해서도 에버랜드와 같은 주주 손해설을 적용한 탓이다. 판결문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이 사건과 같이 자금을 조달하는 목적이 아니라 증여세 등 조세를 회피하면서 지배권 이전을 목적으로 신주 등을 발행하는 경우에서 회사 경영자에 대하여 기존 주주들에 대한 임무 위배(배임)를 이유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상법 제401조) 등의 방법을 통하여 그 책임을 묻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회사에 대한 임무 위배를 이유로 업무상 배임죄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할 것이다.” 자본조달이 아닌 경영권 승계나 증여세 포탈의 목적으로 사채를 헐값 발행했다면 기존 주주가 손해를 봤을 뿐 회사에는 손해가 없으니 경영진을 배임 혐의로 처벌할 수 없다는 뜻이다. 2심 재판부는 이런 사안에 손해배상 같은 민사상 책임을 묻는 것은 몰라도 형사상 책임은 물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것은 특검 수사를 촉발한 고발인 측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사는 대목이다. 법학교수의 에버랜드 고발을 주도한 곽노현 방송대 교수는 “재판부의 논리대로라면 실제 피해자는 에버랜드의 대주주였던 제일모직 등 삼성 계열사인데, 그들이 에버랜드를 상대로 소송을 낼 수 있겠냐”라고 반문하며 재판부가 재벌이라는 한국적 특수상황을 과연 감안한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질타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도 “이중대표소송 같은 민사소송 제도가 제대로 구축돼 있다면 이 사안이 형사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재벌의 지배권을 이전하는 모든 불법적인 자본 거래를 용인하는 위험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뉴시스지난 4월 삼성은 이건희 회장 경영 일선 퇴진 등 경영 쇄신책을 내놓았다.
항소심 재판부, 대법원 판결 뒤집어

이번 항소심 판결은 상급심인 대법원 판결도 정면으로 뒤집었다. 대법원은 신주나 사채가 헐값으로 발행된 경우, 회사가 비싸게 팔 수 있는 물건을 싸게 판 셈이므로 회사의 손해가 인정되고 경영진에 대한 배임 처벌도 가능하다고 두 차례나 판결한 바 있다. 가령 2001년 에버랜드  CB 사건과 매우 유사한 맥소프트뱅크 신주 헐값 발행 사건(판결 2001도3191)의 경우 대법원은 배임죄를 인정했다. 당장 16개월째 대법원에 계류된 에버랜드 전·현직 사장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지 관심거리다. 이 사건은 2심까지 유죄가 인정된 상태다. 같은 사건을 두고 이를 기획·지시한 ‘주범’에게는 무죄가, 지시를 따른 ‘종범’에게는 유죄가 선고된 셈이니 이런 역설을 대법관들은 모두 유죄 혹은 무죄로 정리해야 한다. 항소심 재판부도 이를 의식한 듯 대법원 판례와 배치되는 판결이므로 결국 대법원이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12월 초순께 최종심 선고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이번 항소심 판결에 대해 시민단체에서는 ‘기업지배구조의 선진화와 합리적 시장 질서를 위해 지난 10년간 공들여 쌓아올린 탑을 한순간에 와해했다’(경제개혁연대 등), ‘사법부가 사법정의와 시장 질서를 스스로 무너뜨렸다’(경실련) 등으로 격하게 비난했지만, 전경련 등 경제계는 일제히 환영 논평을 냈다. “이 전 회장을 엄격히 단죄해 다시는 편법 승계가 없도록 해달라는 여론과 국민 경제에 대한 그간의 기여를 고려해 관대하게 판결해달라는 동정론이 함께 존재해 여론의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라는 재판부의 소회가 고스란히 현실화한 것이다.

초법적 경제 권력에 사법부가 무릎을 꿇었다는 비난이 만만치 않고 이것이 확정 판결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지만, 삼성 측으로서는 일단 한 고비를 넘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경제계는 1996년부터 12년간 경영권 세습 논란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은 것으로 평가한다. 시간도 벌었다. 이 전무가 보유한 에버랜드 지분을 처분하거나 순환출자 방식의 그룹 지배구조를 당장 손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 전무로의 경영권 승계 작업에 속도가 붙으리라는 전망도 나온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지난 4월 경영쇄신안 발표대로 이 전무가 해외 근무에 나서지만 복귀 시점은 지배구조 변화 시점과 맞물릴 가능성이 크다”라고 말했다. 이건희 전 회장이 확정 판결 후 경영 일선에 복귀하리라는 관측도 나오지만, 여론을 자극할 이 방법보다는 막후 영향력을 행사할 공산이 크다.

 삼성 사정에 밝은 한 재계 관계자는 삼성이 대내외 분위기 쇄신을 위해 여러 후속 조처를 내놓으리라고 관측한다. 대법원 판결 이후 올 연말이나 내년 초 전면적인 쇄신 인사를 단행하는 등 조직 정비에 나설 것이라는 것이다. 쇄신안 중 남은 과제인 이 전 회장의 차명재산 처리와 사외이사 개선 방안도 내년 3월 주주총회 때까지는 내놓으리라고 본다. 무엇보다 삼성이 미국발 금융위기와 경제 불안을 타개하기 위해 경제 살리기에 적극 나서리라고 관측한다. 여론을 무마할 최선책으로 여기는 까닭이다.

기자명 장영희 전문기자 다른기사 보기 coo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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