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냉면의 계절이다. 이렇게 말하면 버럭 하실 분도 있으리라. 여름이야말로 냉면 제철 아니냐고. 아무려면 어떠랴. 나 또한 여름에는 벌컥벌컥 육수 들이켜는 맛에, 겨울에는 볼이 터지게 국수를 입에 담고 몸 부르르 떠는 맛에 냉면을 찾는다. 봄가을에는 날씨답게 담담하고 슴슴한 냉면이 각별하다.
겨울 냉면이 제철이라는 이야기는 꽤 오래 전부터 나왔다. 홍석모(1781~1857)의 〈동국세시기〉는 냉면을 동짓달의 별미로 기록했다. “메밀 면을 무김치와 배추김치에 말고 돼지고기를 썰어 넣은 것을 냉면이라고 한다. 평안도의 냉면이 제일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농사는 벼, 보리, 조에 집중한다. 남는 땅에는 장을 담그는 콩을 심어야 한다. 메밀은 여력이 있을 때 가장 나중에 심었다. 대개 양력 11월 중순쯤 수확해 겨울 농한기에 제분했다.
냉면은 차가운 국물에 말아 특유의 미각을 실현하는 음식이다. 냉장고가 없던 옛날, 시린 국물은 겨울 한 철에만 가능했다. 면부터 국물까지, 냉면은 어쩔 수 없는 겨울 음식이었다. 게다가 쩡한 겨울 김치가 풍미를 더한다. 목으로는 찬 음식이 들어오는데, 엉덩이에서는 온돌의 열기가 느껴진다. 그렇게 냉면은 한겨울에 온몸의 감각으로 먹는 별미였다. 그 감각을 대중잡지 〈별건곤〉 1929년 12월호는 이렇게 묘사했다. “살얼음이 뜬 김칫국에다 한 젓가락 두 젓가락 풀어 먹고 우르르 떨려서 온돌방 아랫목으로 가는 맛! 평양냉면의 이 맛을 못 본 이여! 상상이 어떻소!”
그러다 19세기 인공 제빙과 냉장고의 시대를 지나며 냉면은 사계절 음식으로 몸을 바꾼다. 외식과 손잡으면서는 ‘선주후면(먼저 술부터 마신 뒤 냉면을 먹는 것)’과 같은 풍속이 본격화한다. 〈조선중앙일보〉 1936년 6월4일자는 이 점을 잘 보여주는 재미난 자료다. 꼭지 제목부터 ‘미각의 초하(초여름)’다. 인물과 사건에 집중하던 당시 보도사진 관행으로 미루어볼 때 냉면을 정중앙에 등장시킨 건 상당한 파격이다.
오늘날 같은 ‘면스플레인(냉면에 대해 가르치려 드는 것)’ 놀이도 총출동한다. 냉면의 고향은 평양이고 본바닥 냉면이 ‘진짜’란다. 당시에도 선주후면을 평안도에서 유래한, 냉면 맛나게 먹는 법으로 여겼다. 아울러 동짓달 밤에 꿩고기 동치미국을 한 그릇 먹어낸 다음에 덜덜덜 떨며 아랫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는 겨울냉면의 맛도 인정한다. 그러고는 정말 하고 싶은 말이 튀어나온다. “냉면의 미각은 아무래도 첫여름!”
“풋김치를 얹어놓고 젓가락을 휘휘 두르다 후룩후룩 들이마시고”
이 꼭지에 따르면 “새로 심은 배추가 너울너울 밭을 건너가는 바람에 나부끼는 계절에 갓김치를 섞어서 시금시금한 초국(시큼한 육수)을 사발에 듬뿍 뜬 뒤에 풋김치를 얹어놓고 젓가락을 휘휘 두르다 후룩후룩 들이마시고 사발 냉수를 들이켜는 맛”이야말로 냉면의 참맛이란다.
사진 속 냉면 사발 반쯤이나 되는 김치 그릇도 재미나다. 당시 평안도에서는 냉면을 먹을 때 국수 따로, 육수 따로, 김치 따로 세 그릇을 놓고 한 그릇씩 “죽여넣는 데서” 쾌재를 부르며 먹곤 했단다. 냉면은 담박한 맛이 핵심인데 서울로 올라오면서 “담박한 맛은 없어지고” “간장국이 짭짤히 엉킨” 서울식 미각으로 변했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냉면이 사계절 내내 먹는 전국 음식이 된 지 100년이다. 겨울냉면이냐 여름냉면이냐 따지는 냉면 식도락이 모두의 놀이가 된 지도 100년이라는 이야기다. 냉면은 서민 대중이 어떻게 음식 담론을 만들어내는지 잘 보여주는 특별한 예다. 이 겨울, 새삼스레 냉면 문헌을 뒤진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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