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에서는 연말마다 ‘BBC 사운드 오브(BBC Sound of)’라는 타이틀로 리스트를 공개한다. 중요한 점은 ‘of’의 뒤에 다음 해의 연도가 붙는다는 것이다. 즉, 얼마 전에 공개한 리스트는 ‘BBC 사운드 오브 2018’이 된다. 우리말로 바꾸면 ‘2018년의 기대주’ 정도인 셈이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는 2003년이었다. 이후 위에 언급한 뮤지션과 밴드 외에도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음악가가 BBC로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렇다면 2018년에는? 역시 과거의 일기가 아닌, 미래의 달력에 이름 새기기를 꿈꾸는 뮤지션과 밴드들이 이름을 올렸다. 그중에서도 친숙한 발음을 지닌 한 명이 유독 눈에 띈다. 영어로는 ‘Yaeji’, 한글로는 예지. 그렇다. 예지는 한국인이다. 심지어 BBC는 예지의 음악을 평가하며 “이런 음악은 한 번도 못 들어봤을 것”이라고 확언했다.
글쎄, 조금 과찬이 아닌가 싶지만 예지의 음악이 특별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게다가 미국에서 성장하고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만큼 예지에게는 이른바 한국적인 정서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녀는 한국어와 영어를 음악 속에 함께 녹여낸다. 예지에 따르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게끔 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한다.
한 곡만 고르라면 아무래도 ‘Drink I’m Sippin On(내가 마신 음료수)’을 꼽을 수밖에 없다. 예지가 운용하는 주요 장르는 딥 하우스다. 딥 하우스는 하우스에서 파생된 서브 장르로 하우스보다는 좀 더 템포가 느리고, 솔(Soul) 느낌을 강조한 거라고 보면 된다. 여기에 잠에서 막 깬 듯한 예지의 목소리가 더해져 독특한 분위기를 창조해낸다. 음악 비평 사이트 ‘피치포크 미디어’가 예지의 음악을 두고 ‘Foggy and Dazed(안개 낀 듯 멍한)’이라고 표현한 이유다.
솔직히 대중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음악이다. 가창력 역시 전통적인 측면에서 ‘잘 부른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 ‘Drink I’m Sippin On’의 뮤직비디오에 대한 유튜브 댓글이다. 외국인들은 대부분 ‘Dope!(중독성 쩔어!)’라는 단어를 써가며 엄지를 세우는 반면, 도리어 한국인들이 예지의 음악을 낯설어한다는 게 흥미롭다. 예지에 대한 한국 기사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 역시 마찬가지다. 그간의 미디어 관행을 고려해보면, 한국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화제가 되고도 남았을 텐데 말이다.
한국 가요의 무소불위 권력이 가능한 이유
방탄소년단의 미국 내 히트에서 알 수 있듯이 트랜스내셔널(초국가적 현상)은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과 글로컬리제이션(세계화와 지역화의 동시 진행)을 넘어 이제 글로벌 감수성의 요체가 된 지 오래다. 그러나 한국 음악 팬들의 감수성은 여전히 글로벌라이제이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음악에 관해서라면, 로컬에서 글로벌로의 확장에는 환호를 보내지만(속칭 ‘국뽕’), 글로벌에서 로컬로의 진입에는 전 세계에서 유례없이 폐쇄적이라는 뜻이다. 한국 가요가 국내 시장에서만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바탕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예지의 음악은 국내에 정식 발매조차 되지 않은 상태다. 듣고 싶다면 현재로서는 유튜브를 이용하는 게 최선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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